고분군은 구드레나루의 건너편 접관사가 있는 구릉의 남향 사면에 위치한다. 이곳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은 단면 6각형의 형태인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지표면에서는 고분 축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다란 자연석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이 장대석은 무덤의 귀접이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에 발굴 조사되었고 부여지방에서 희귀하게 발견된 토광묘이다. 고분은 부여 구드래나루에서 백마강을 건너 500m 거리의 ‘깨메깟’이란 야산의 서남 능선의 중턱에 위치해 있다.
고분은 장축을 남북으로 해 능선의 방향과는 직각으로 구축되어 있다. 석비레층을 장방형으로 광을 판 후 벽면을 고르게 정리해 맨땅을 그대로 이용한 전형적인 토광묘이다. 봉토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토광의 크기는 남북 길이 2.58m, 동서 너비 1.08m이다.
벽면은 현재 동쪽 장벽과 북쪽 단면만이 낮게 남아 있고 서쪽과 남쪽의 벽은 대부분 없어져 흔적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북벽의 높이는 75㎝이고 동벽은 86㎝이다. 지질은 위에서부터 33㎝까지는 사질토층(砂質土層)이고 그 아래 50㎝는 석비레층이다. 바닥도 벽면과 같이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맨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상개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토광 내에서 주먹크기의 돌이 다수 나왔다. 이것은 조선시대 토광묘의 목판횡대(木板橫帶)와 같이 나무를 가로 걸치고 그 위에 흙과 돌을 섞어 봉토를 조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유물은 4종 29점이 출토되었다. 금동제환(金銅製環) 1점, 철제도자편(鐵製刀子片) 1점, 철제관정(鐵製棺釘) 17점 등이 있는데 모두 부식이 심해 온전하지 못하다. 또한 연질의 적색토기파편 10여 점이 있다.
장법은 목관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목관의 사용을 알 수 있다. 침향은 유물배치로 보아 북침장(北枕葬)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토광묘로는 서울 가락동, 충청남도 서산군 명지리, 부여군 소사리 등지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이 중 가락동의 토광묘는 생토층을 파서 광을 만든 것이 아니고 점토를 다진 일종의 토축묘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성격이 다르다. 명지리와 소사리의 토광묘는 대체로 비슷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토광묘와 신리의 토광묘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신리토광묘는 위치상으로 30°가량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방향을 능선의 방향과 직교가 되게 하였다. 둘째, 명지리와 소사리에서는 목관의 흔적이 없으나 신리에서는 17점의 목관정이 나왔다. 셋째, 토광의 상개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나 명지리와 소사리의 토광에서는 고운 점토만이 나오고, 신리의 토광에서는 주먹만한 자갈이 다수 나온 점으로 보아 상개부의 시설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연대는 구조와 출토토기편 등의 유물로 볼 때, 명지리와 소사리보다는 시대가 떨어지는 시기, 즉 이 지방에 많은 판석조석실분이 조영되던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