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칠주는 동학의 핵심사상이 담겨 있다는 21자(字) 주문을 가리키는 천도교용어이다. 1860년 4월 5일 최제우가 경험한 종교체험의 중심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로 되어 있다. 하느님의 신령이 직접 인간의 몸에 내려 기화하기를 기원하는 주문이다. 이 주문을 외워 소리 내어 말하고 그 뜻을 깨달아 실현하면 오래도록 죽지 않는다 하여 장생주라고도 한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시천주’ 세 글자에 가장 핵심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주문의 주술적인 힘도 중요하다.
1860년 4월 5일 최제우(崔濟愚)가 경험한 종교체험의 중심내용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서,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로 되어 있다.
이것을 외워 소리내어 말하고 그 뜻을 깨달아 실현하면 오래도록 죽지 않는다 하여 장생주(長生呪)라고도 한다. 특히, 앞의 8자를 강령주문(降靈呪文)이라 하고, 나머지 13자를 본주문(本呪文)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신령이 직접 인간의 몸에 내려 기화(氣化)하기를 기원하는 주문이다. ‘지(至)’란 지극하다는 뜻이요, ‘기(氣)’란 하늘 조화(造化)의 일원적인 기운을 말한다. ‘금지(今至)’는 하느님의 신령 기운이 내 몸에 직접 내려 지피는 것을 아는 것이고, ‘원위(願爲)’란 청하여 비는 뜻이다. ‘대강(大降)’이란 그 맑고 밝은 신령(神靈)이 직접 내 몸에 내려 기화하기를 원함이다.
즉, 우주의 생명력이고 만물의 조화력인 지극한 기운이 이제 자신에게 이르러 크게 내리는 것을 청하는 것으로, “몸이 몹시 떨리고 추워 밖으로 지기로서의 그 맑고 밝은 영이 직접 몸에 내려 지피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리는 가르침이 있었으나,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라는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다.
최제우는 “13자 지극하면 만권시서(萬卷詩書) 무엇하리”라고 「교훈가(敎訓歌)」에서 이 부분의 중요성을 평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시천주(侍天主)의 3자는 ‘지극히 하느님을 위하는 글(至爲天主之字)’인 21자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최제우는 「논학문(論學文)」에서 “하느님을 모신다고 하는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밖으로 기화함이 있게 되는 법인데, 온 세상 사람들이 이를 결코 옮기지 못할 하느님 조화의 지극한 기운, 즉 지기인 것으로 깨달아 앎이다(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고 하여 지기에 대한 자각을 시천주로 보았다.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도 “우리 사람이 생겨나게 된 것은 하늘을 모신 심령 기운으로 생겨나게 된 것이요, 우리 사람의 생활도 하늘을 모신 심령 기운으로 생활하는 것이니라. 어찌 사람만이 홀로 하느님을 모셨다고 이르리오. 천지만물이 다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 새의 우는 소리 또한 하느님을 모신 심령 기운으로 생겨나는 소리니라(吾人之化生 侍天靈氣而化生 吾人之生活 亦侍天靈氣而生活 何必斯人也獨謂侍天主 天地萬物皆莫非侍天主也 彼鳥聲亦是侍天主之聲也).”고 하여, 하늘 조화의 지극한 기운으로서의 지기의 자각이 곧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임을 밝혔다.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역시 “하느님을 모신다는 경우의 모실 ‘시(侍)’자는 곧 하느님을 자각한다는 뜻이다(侍天主之侍字 卽覺天主之意也).”라 하였다. 그리고 시천주의 본 자세로 정성[誠] · 공경[敬] · 믿음[信]이 강조된다.
하느님을 모신다고 함은 기실 이미 내 몸에 모시고 있는 ‘하느님 조화의 참된 그 마음을 고이고이 삼가 지켜 이를 공경하고 믿는 데서 창조의 바른 기운을 살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시형 역시 “우리 도는 다만 정성 · 공경 · 믿음의 세 글자에 있으니…… 이 정성 · 공경 · 믿음에 능하면 성인(聖人)에 들기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다(吾道只在誠敬信三字…… 果能誠敬信 入聖如反掌也).”라고 하였다. 따라서, 모심[侍]을 떠난 성 · 경 · 신은 있을 수가 없으며, 이 시천주를 떠나면 ‘하느님 조화의 맑고 밝은 덕에 합함(合其德)’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신다고 함은 하느님을 위해(爲天主), 하느님의 참된 심기(心氣)를 제 몸에 이어받아 이를 기르며(養天主), 하느님의 뜻과 도리를 따라(顧天命 · 順天理) 조화를 부릴 수 있게(造化定) 됨을 의미한다.
사람이 하늘을 모신다고 함은 언제나 하늘과 더불어 같이 생각하고 같이 행한다는 것이니, 최시형의 “사람이 하늘이요 하늘이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사람이 없다(人是天 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라는 사상이나, 손병희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의 요지가 바로 그것이다.
‘나를 향하여 신위(神位)를 베풀 것(向我設位)’이지 결코 벽(壁)을 향하여 신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새로운 제사 방법과,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以心治心)’ 또는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라는 표현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한 것이다.
조화정(造化定)이란 무궁한 천지조화의 체험에 대한 인간의 창조적 참여를 일컫는다. 이러한 인간의 창조적 참여는 하느님을 모심으로써만 가능하므로, 조화정의 가능 근거는 어디까지나 시천주에 있다. 인도(人道)는 오직 천도(天道)로서의 하느님 조화의 정립에 있을 뿐인 것이다. 「논학문」에 따르면 “조화란 그저 저절로 됨이요, 정(定)이란 그 덕에 합하여 마음을 정립함이다(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 定其心也).”이라 하였다.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그저 저절로 되는 바의 ‘자연적인 됨(無爲而化)’이며 무궁한 천지의 화육(天地之化育)이 하느님의 조화인 것이다. 이 ‘됨’의 이치를 주체적으로 자각하여 ‘이에 합함’이 바로 합기덕(合其德)이다. 그 덕에 합하여 마음을 정립하는 것(合其德定其心)이 바로 조화의 현실적 정립이며, 실지로 사물을 변화시켜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다.
영세불망(永世不忘)이란 하느님 조화의 밝고 밝은 덕성(德性), 즉 ‘그저 저절로 됨’이라는 자연적 조화의 이치를 평생토록 잊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마침내 지극한 기운에 화(化)하여 성인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최제우에 따르면 “영세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란 생각을 둔다는 뜻이다(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그런데 사람이 평생토록 생각을 두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 조화의 밝고 밝은 원(元) · 형(亨) · 이(利) · 정(貞)의 네 가지 덕, 즉 그저 저절로 된다(無爲而化)라고 하는 조화성 자체로서의 지기(至氣)이다.
이미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인 인간이 그의 시천영기(侍天靈氣)를 죽을 때까지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음이 영세불망의 본뜻이라 할 수 있다.
만사지(萬事知)란 조화의 도리를 깨닫고 이를 역행(力行)에까지 실현시키게 되는 조화의 각행(覺行)을 나타낸 것이다. 「논학문」에 따르면 “만사란 수(數)의 많음이요, 지란 그 도를 알고서 그 지를 받는 것이다(萬事者 數之多也, 知者知其道 而受其知也).”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면 그 수란 무슨 수이며 그 도란 무슨 도인가? 도는 천도, 즉 조화의 도리를 말하며, 수의 많음이란 현실적 형태로 정립되는 조화정의 온갖 일의 가지수가 많다는 것으로, 조화의 체험으로서의 인간의 창조적 참여사(參與事)가 많음을 의미한다. 천변만화하는 조화의 수가 많지만, 결코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닌 만큼, 그렇게 되는 조화의 도리를 깨달아[知其道], 그 조화를 실제로 부릴 줄 아는 슬기를 받도록[受其知] 하기 위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화의 도리를 깨달아 안다.’고 함은 지기의 자각을 규정하는 시천주에 다름아니고, 또 ‘조화를 실제로 부릴 줄 아는 슬기를 받음’이란 조화의 체험을 규정한 조화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기도(知其道)의 근원은 시천주에 있고 수지기(受其知)의 근거는 조화정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최제우는 하느님 조화의 조화성(造化性)인 지기(至氣) 자체로써 자각된 사람의 시천영기를 파악하고, 그것을 지기 자체의 궁극적인 자기불연성(自己不然性)에 의해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일만 가지의 일을 행하는 길이 됨을 알아, 평생토록 잊지 말 것을 주문의 내용으로 하여 당부했던 것이다. 이로써 만사지의 지(知)란 단순한 인식지(認識知)가 아니라 인식과 실천을 다 포괄하는 조화의 각행임을 알 수 있다.
즉,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그렇지 않은 그것이 그렇다(不然其然).’라는 조화를 깨달아 이를 몸소 부릴 수 있도록 주문적으로 규정해놓은 것이다. 시천주의 자각을 떠나서는 만사지는 물론 조화정의 창조적인 참여도, 영세불망의 존상(存想)도 있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교훈가」의 “격치만물(格致萬物)하는 법과 백천만사(百千萬事) 행하기를 조화중에 시켰으니”라는 부분 및 「흥비가(興比歌)」의 “무궁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不然其然)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는 부분은 이러한 조화의 각행이 곧 만사지의 주요 내용임을 짐작하게 한다.
결국, 강령주문은 조화의 궁극적인 근거인 지기, 즉 조화성 자체의 체득(體得)을 기원한 것이요, 본주문 중 시천주의 석 자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이라는 자각, 즉 기화지원(氣化之願)이 이루어진 상태로서의 조화성에 대한 주체적 파악을 규정한 것이며, 조화정은 시천주의 자각하에 인간의 창조적 참여를 규정한 것이고, 영세불망은 인간의 시천영기, 즉 조화성 자체로서의 맑고 밝은 그 덕(明明其德)의 존상을 나타낸 것이며, 만사지는 조화의 각행을 규정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자구적 해석(字句的解釋)과 의미의 파악은 주문으로서의 삼칠주에 대한 성격 파악으로 충분하지 않다. 동학교도나 천도교 신자들에게는 말의 의미뿐만 아니라, 말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주술적인 힘도 같이 수용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