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산(連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구구재(九九齋). 서효적(徐孝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필행(徐必行)이고,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서욱(徐욱)이며, 어머니는 박율(朴繘)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생원이 되고, 1732년(영조 8) 성균관의 반제(泮製)에서 장원하여 전시에 직부(直赴)하라는 특전을 받았으나 이복령(李復齡)과 시권(試券)이 바뀌었음을 자백하여 취소되었다.
이 해 이 일을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하였으며, 이듬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옮겼다. 1735년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7년 자여찰방(自如察訪)으로 나갔다가 목릉별검(穆陵別檢)을 거쳐 1742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다.
1745년 예조·병조좌랑과 병조정랑을 거쳐, 연풍현감으로 나가 빈번한 사행(使行)으로 인한 민폐를 덜어주었다. 1751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직무가 번거로운 내직을 피해 외직을 원하던 조재호(趙載浩)를 탄핵하였다.
곧이어 이조정랑으로 옮겼으며, 1753년에는 황해도의 향시(鄕試)를, 1755년에는 전라도의 향시를 주관하였다. 1763년 병조참의에 오르고, 1770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30여 년의 관직생활 동안 한 번도 권세있는 사람에게 아첨한 적이 없었다. 두보(杜甫)의 시를 좋아하였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문장을 좋아하였다. 특히 제례에 밝았다
저서로는 『두시보주(杜詩補注)』·『좌사초류(左史抄類)』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