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1권 1책의 국문 필사본 10종, 1권 1책의 한문 필사본 1종이 전한다.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의 기관을 비롯하여 다수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옥소(玉所) 권섭(權燮)이 한역한 한문 필사본의 표제는 ‘번설경전(翻薛卿傳)’이며, 국문 필사본의 표제는 ‘셜졔젼’·‘셜비효ᄒᆡᆼ록’·‘의녈비튱효록’·‘의렬왕비츙효록’ 등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하는 이본 가운데 ‘설소저전’을 제목으로 하는 이본은 없다. 이는 작품을 처음 영인하여 출판할 때 ‘설소저전’으로 잘못 소개한 것이 굳어진 것이다.
송나라 인종 때 이부시랑을 지낸 설문백(薛文白)은 늦게야 딸 월애(月愛)를 얻는다. 설 소저(설월애)는 3세에 어머니를 잃고 10세가 되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가사를 돌보며 지낸다. 이때 권신 최훈(崔薰)이 설 시랑(설문백)의 집을 자주 왕래하다가 설 소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설 소저와 아들과의 혼사를 청한다. 설 시랑은 최훈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청혼을 거절하였더니, 이에 최훈이 앙심을 품고 설 시랑을 해치려고 한다.
하루는 최훈이 여염에 나갔다가 유생 이현(李賢)의 처 정씨(鄭氏)의 아름다움을 보고 반하여 간통하고자 하니, 정씨가 손을 깨물어 혈서를 써 놓고 자결하고 만다. 설 시랑이 이현의 호소를 듣고, 황제에게 최훈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작성한다. 이를 알게 된 최훈은 더 깊은 앙심을 품고, 설 시랑을 황제에게 주1하여 황제를 모독한 죄로 몰아 북해로 유배시키도록 한다.
최훈이 또 설 소저를 강제로 며느리로 삼고자 하니, 설 소저는 순응하는 척하고 자신의 몸종을 자기 대신 예를 올리게 하여 최훈의 집으로 보낸다. 그리고 자기는 시녀 여환과 같이 남장을 하고 청암사로 들어가 병서와 무예를 익힌다. 그리하여 이듬해 과거에 응시, 장원급제한다.
황제는 설 장원(설월애)을 한림학사로 삼으니, 설 학사(설월애)는 황제에게 아버지의 무죄와 최훈이 모함하였다는 것을 상소한다. 황제는 이현을 불러 그 사실 여부를 알아낸 후, 병부상서 최훈을 파직시키고 유배 보냈으며, 자결한 정씨를 정렬부인에 책봉한다. 그리고 설 학사에게 아버지를 모셔오게 하고는, 설 학사를 부마로 간택한다는 전교를 내린다.
설 학사는 여러 난관을 겪으며 북해의 유배지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만난다. 설 시랑은 상경하여 조정에 들어가 황제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딸이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속인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한다. 이에 황제는 천고에 없는 기쁜 일이라 하며 크게 감탄한다. 황제는 여인네의 옷으로 갖추어 입은 설 소저의 알현을 받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성왕의 비로 삼고 설 시랑을 좌승상으로 삼는다. 왕비(설월애)는 8남 3녀를 낳고 76세에 성왕의 뒤를 이어 죽는다.
이 작품은 남복한 여인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특이한 작품이다. 처녀의 몸으로 남복하고 산사에 들어가 병서와 무술을 익히고, 장원급제하여 아버지의 억울한 유배를 풀게 하는 것은 여성 영웅소설의 유형성을 띤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통한 주인공의 영웅적 활약은 나타나지 않아, 주인공의 영웅성이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특징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여성 영웅소설의 성격뿐 아니라 가문소설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특히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는 인물과 반유교적 인물의 대치, 유교 이념에 대한 인물의 내적갈등이 특징적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의 한역본 「번설경전」은 옥소 권섭이 1724년에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사대부 및 한문 식자층들이 국문소설의 가치를 발견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알 수 있고, 국문소설의 한역이 한문소설의 창작 및 독서에 영향을 주었으며, 국문소설의 전승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