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신지(愼之). 아들은 충렬왕(忠烈王)대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설공검(薛公儉)이다.
선계(先系)가 순창의 향리(鄕吏)였으며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1216년(고종 3) 함풍현(咸豐縣)의 감무(監務)로 나가 치적이 드러남으로써 최충헌(崔忠獻)의 포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뛰어난 이재(吏才)를 발휘하였다.
그 뒤 식목도감(式目都監)의 녹사(錄事), 대관승(大官丞)·비서랑(祕書郎), 추밀원(樞密院)의 당후관(堂後官)·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거쳐 1227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 용주(龍州)에 외보(外補)되었으며 다시 병부(兵部)·이부(吏部)의 원외랑을 역임하고 1231년에는 내시(內侍)에 입적되었다.
몽고침입기인 1232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몽고에 사행(使行)하여 과중한 공물(貢物)의 징구에 대한 고려측의 입장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해 고려에 재침략한 몽고의 살리타이[撒禮塔]에게 억류되어 몽고군 지휘부를 따라갔다가, 살리타이가 처인성(處仁城)에서 김윤후(金允侯)와 처인부곡민(處仁部曲民)들에게 사살되자 비로소 풀려났다.
대부소경(大府少卿)·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1234년충주부사(忠州副使), 이어 호부(戶部)·예부(禮部)의 시랑(侍郞),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등을 지내고 1251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8형제 가운데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어머니 조씨(趙氏)가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성격은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한다. 김백일(金百鎰)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