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일(仲一), 호는 명탄(明灘)·원당(圓塘).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9년 (숙종 15) 기사환국 때 유학(幼學)으로 정도균(鄭度均)·홍경렴(洪景濂) 등 여러 선비들을 이끌고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시골로 쫓겨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앞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다. 1696년 이현명(李顯命)의 상소문을 대신 써주었다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나 평시서봉사·한성부참군 등을 지냈다.
1705년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相運)을 구하려던 상소로 인하여 이명준(李明俊)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수춘산(壽春山)에 들어갔다. 1726년(영조 2)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임명되자 시국의 당면과제 7조를 건의하였고, 1736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여러 기예에 능통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춘천의 곡운서원(谷雲書院)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