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규헌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첨지중추부사, 오위장,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일(仲一)
명탄(明灘), 원당(圓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7년(인조 25)
사망 연도
1741년(영조 17)
본관
창녕(昌寧)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첨지중추부사, 오위장,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일(仲一), 호는 명탄(明灘)·원당(圓塘).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9년 (숙종 15) 기사환국 때 유학(幼學)으로 정도균(鄭度均)·홍경렴(洪景濂) 등 여러 선비들을 이끌고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시골로 쫓겨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앞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다. 1696년 이현명(李顯命)의 상소문을 대신 써주었다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나 평시서봉사·한성부참군 등을 지냈다.

1705년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相運)을 구하려던 상소로 인하여 이명준(李明俊)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수춘산(壽春山)에 들어갔다. 1726년(영조 2)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임명되자 시국의 당면과제 7조를 건의하였고, 1736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여러 기예에 능통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춘천의 곡운서원(谷雲書院)에 봉향되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매산집(梅山集)』
『청선고(淸選考)』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