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감찰, 공조정랑,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시호
희정(僖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86년(우왕 12)
사망 연도
1448년(세종 30)
본관
창녕(昌寧)
주요 관직
감찰|공조정랑|공조좌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감찰, 공조정랑,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판도사총랑(版圖司摠郎) 성군미(成君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성여완(成汝完)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성석인(成石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음보(蔭補)로 공정고주부(供正庫注簿)가 되고 감찰·공조정랑·공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태종 14) 군자시부정·대호군을 거쳐 1416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좌군사지총제(左軍司知摠制)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에 딸이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 출가하여 경녕옹주(敬寧翁主)로 봉해지고, 1418년에 성녕대군이 홍역으로 14세에 요절하자, 태종이 애통히 여겨 성억의 일족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게 하였다. 이로써, 성씨일문은 조선의 명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421년(세종 3) 집현전부제학, 이듬해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공조참판, 1427년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공조판서를 거쳐 1431년 중군도총제가 되었다.

이 때 호군(護軍) 최성(崔成)과 순청(巡廳)에서 큰 소리로 싸운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외척이라 하여 용서받았다. 1439년 우찬성·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창녕성씨족보(昌寧成氏族譜)』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