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은 불교의 체용론을 원용, 인간의 심성을 해명하면서, ≪주역≫의 ‘적연부동(寂然不動)과 감이수통(感而遂通)’, ‘동(動)과 정(靜)’ 및 ≪중용≫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을 이 체용 논리로 해명하였다.
그런데 성리학의 심성론은 맹자(孟子)의 심성론을 계승한 것으로, 이황(李滉)은 그의 <심무체용변 心無體用辯>에서 “성정을 체용으로 삼은 것은 맹자에 근본한다”하고, 이는 마음[心]의 체용이라 하였다.
이이(李珥)도 그의 <논심성정 論心性情>에서 “사람에게 부여된 천리(天理)를 성이라 하고, 성과 기(氣)가 모여 한 몸의 주재가 된 것을 마음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밖으로 드러난 것을 정이라 한다.
성은 마음의 체요, 정은 마음의 용이요, 마음은 이발과 미발의 총명(總名)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성정을 총괄한다”고 하였다. 즉, 심통성정(心統性情)의 원칙 아래 성정은 각각 심의 체용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주희(朱憙)가 “정은 성의 용이요, 성은 정의 체이다”라고 한 것도 심을 성정의 주(主)로 본 전제에서 한 말이며, 심을 떠나 성정을 말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 말은 체용으로써 성정을 떠나거나 성정을 초월한 성도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정자(程子)는 이 점을 밝혀 “마음은 하나일 뿐이다. 간혹 체를 지적해 말한 경우도 있고, 용을 지적해 말한 경우도 있다. 이제 이미 체용이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하면, 마음에 대한 해설은 남김 없이 다 된 것이니, 어찌 별도로 체용이 없는 마음이 있어 그것이 근본이 되고 마음 앞에 있을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체용일원(體用一源)의 입장에서 심을 해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리학의 성정을 심의 체용으로 보는 이론은, 나흠순(羅欽順)에 이르러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된다. 그는 ≪곤지기 困知記≫에서 “도심은 성이요, 인심은 정이다” 라고 하여, 마음의 두 가지 양상인 도심과 인심을 곧바로 성과 정으로 이해하였다.
즉 전통 성리학이 성정을 심의 체용 구조로 해석하고 도심은 성명(性命)의 바름에서,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나오는 것으로 본 데 반해, 그는 도심은 바로 성이고 인심은 바로 정이라 하여, 이 도심으로서의 성과 인심으로서의 정을 체용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즉, 나흠순에 있어서 성정체용설은 성리학의 성정체용설과는 달리 그 구체적인 성정의 내용을 도심과 인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