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물에 씻어 글씨를 지우고 재생 종이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초본 자체를 소각 또는 파기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까지는 초본들도 정본과 함께 각 사고(史庫)에 보존했으나, 1616년(광해군 8) 『선조실록』 편찬 이후부터 세초가 정례화되었다.
세초는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세검정의 개천에서 행해졌다. 이때 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부근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洗草宴)이라는 잔치가 베풀어졌다. 따라서 세초는 곧 이 잔치를 뜻하기도 하고, 실록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세초의 대상이 되었던 자료들은 사관들이 왕의 측근에서 그때그때 작성한 사초와 실록 편찬 과정에서 작성되었던 초초(初草) · 중초(中草) · 정초(正草) 등이었다. 사초 중에는 실록 편찬 시 제출하지 않아 가끔 현전하는 것이 있으나, 초고는 모두 세초되어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광해군일기』는 활자로 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중초본[태백산사고본(太白山史庫本)]과 정초본[마니산사고본(摩尼山史庫本)]이 별도로 전하고 있다.
실록을 편찬한 뒤에 사용되었던 자료들을 파기한 까닭은 무엇보다 비밀이 요구되었던 사초의 유출을 막고, 간행된 국가사에 대해 시비 논쟁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편찬관들의 의도에 상반되는 자료를 남겨 말썽을 야기하거나 정파 간 분쟁에 악용될 소지를 없애기 위한 고려가 반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