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초명은 송승회(宋承誨). 자는 과우(寡尤). 호는 호봉(壺峰). 송수(宋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천현령(陽川縣令) 송말경(宋末璟)이고, 아버지는 부사 송율(宋嵂)이다. 어머니는 좌참찬 신시복(愼時復)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유희춘(柳希春)과 노수신(盧守愼)의 문하에도 출입한 바 있다.
156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다.
1580년 예조좌랑·병조정랑·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역임하고, 1586년 호남에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파견된 뒤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해 홍문관의 전적(典籍)·수찬(修撰), 사헌부의 장령(掌令)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젊어서는 언관으로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과 연루되어 부교리에서 면직되었다.
159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뒤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공조참판이 되어 평안도순찰사를 겸하다가 다시 함경도순찰사를 겸하면서 군병(軍兵) 보집에 힘썼다. 1592년에 삭직되었고, 1596년 동면순검사(東面巡檢使)로 다시 등용된 뒤 대사간·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불교를 배척하여 승 보우(普雨)를 죽일 것을 건의하였다. 또 동면순검사로 재직할 때에는 인력이 부족한 겨울철에 수성책으로서 성벽에 물을 부어 얼리는 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함경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오랑캐의 동정에 각별한 유의를 하고 휘하 수령들을 적절히 장악한 듯하나 여러 번 간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당쟁의 선봉에 섰던 관계로 반대파의 비평이 높았다. 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사람됨이 흉활(兇猾: 음흉하고 교활함)하고 탐비(貪鄙: 탐욕스럽고 비루함)하며 음패(淫悖)스러운 행실이 많아 사인(士人)으로서 교양 있는 사람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였다.
여색을 가까이 했다고 하며 경상(卿相)으로서 『속어면순(續禦眠楯)』과 같은 야담집에까지 이름이 올랐다. 임진왜란과 그 뒤의 어려운 시기에 양사의 장을 역임하면서 당쟁의 선봉이 되었다가 광해군 초년에 축출되었다.
저서로는 『성학지남(聖學指南)』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