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시금(左右侍禁) 각 4인이 있었다. 언제부터 좌우시금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예종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번에 걸친 남반직의 변천과정에서 명칭·인원 및 품계가 그대로 유지되다가 1309년(충선왕 1)의 개정에서 종8품으로 낮아졌다.
주요한 직능은 다른 남반직처럼 내료직(內僚職)으로서 액정국(掖庭局)에 소속되어 궁중 근시(近侍)의 직책을 맡았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1164년(의종 18) 3월에 차내전숭반(借內殿崇班) 조동희(趙冬曦)와 차우시금(借右侍禁) 박광통(朴光通)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는 차(借) 자가 붙은 남반직명이 보이지 않는데 유일하게 의종대에 나타나고 있다. 의종은 호사스럽고 놀기를 좋아하던 왕으로서 격구(擊毬)·유연(遊宴)·시가·음악의 풍류생활과 화려한 의식을 좋아하였으므로, 이 때 내료직의 남반 정원을 늘려 차우시금 등의 관원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