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가 난 후에 조선에 귀화한 중국 명나라 장수이다. 중국 저장(浙江) 출신. 아버지는 명나라 병부시랑 시윤제(施允濟)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격장군(遊擊將軍) 남방위(藍方威) 휘하의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종군하여 7년간 각지에서 많은 전공을 올렸다. 난 후 신병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성주(星州)에 우거하였다. 선조가 시문용의 전공을 포상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고, 성주를 본관으로 하사하였다.
시문용은 군사·풍수·의술에 정통하여 1616년(광해군 8)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을 받아 성지(性智)·김일룡(金日龍) 등과 함께 궁궐 및 왕릉 축조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렇지만 1623년(인조 1)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면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가렴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시문용의 후손들은 시문용이 경북 성주군 수륜면에 내려와 여생을 보내다가 1643년 사망해 마을 뒷산에 안장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시문용을 비난하는 측에서는 시문용이 중국 군사로 도피한 자이며, 정인홍에 의하여 우대, 천거받은 것은 정인홍의 조상이 저장인이었던 점과 풍수·점복(占卜)에 능한 점을 정인홍이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당쟁에 따른 편견일 수도 있다.
시문용은 다방면에 능하여 『병학기정(兵學奇正)』·『감여지남(堪輿指南)』·『의복묘결(醫卜妙訣)』 등을 저술하였다. 정조 때에 임진왜란시의 전공과 명군파견에 힘쓴 시문용의 아버지의 노력에 대한 포상으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후손은 천역에 사역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