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일찍이 청어(淸語) 역관으로 활약하였다. 조선 중기 이래 여진학(女眞學)이 국가의 법전이나 서적에 수록되어 있어 이를 통하여 강서(講書)하고 역관을 양성하였으나, 실제 청인(淸人)과 말을 해보면 뜻이 통하지 않았다.
1626년(인조 4)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신계암이 청어에 능하다고 조정에 천거하여, 이후 10여 년간 청나라에 파견되는 봄·가을의 사신을 따라다니면서 청어를 연구하였다. 이를 통해 청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이후 『구난(仇難)』·『거화(巨化)』·『팔세아(八歲兒)』·『소아론(小兒論)』·『상서(尙書)』 등 5책을 바로 고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청어 교습서(敎習書)로 만들었다. 신계암은 청에 왕래하며 많은 공을 세웠는데 1629년 정묘호란 때 잡혀간 포로쇄환에 노력하여 참상관(參上官)에 오르는 등 계속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