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인(申命仁)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으로 기용되었다가 1556년(명종 11)에 직권남용으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함평현감으로 재임용되었는데, 이 때 왜구의 배를 나포한 공으로 6품직에서 4품직으로 특진되었다.
1571년(선조 4)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573년에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74년에는 제주목사, 1575년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 1583년에는 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병사로서 3도의 근왕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던 중,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 보고 대군이 흩어지자 나중에 패전의 허물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완력뿐만 아니라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순천부사로 있을 때에는 기묘사화 때 희생된 8현(賢)을 추모하여 『팔현전(八賢傳)』을 간행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