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후재 ()

신후재 영정
신후재 영정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동부승지, 강원도관찰사,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부(德夫)
규정(葵亭), 서암(恕庵)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6년(인조 14)
사망 연도
1699년(숙종 25)
본관
평산(平山)
주요 관직
병조참의|동부승지|강원도관찰사|한성판윤
관련 사건
경신대출척|기사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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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동부승지, 강원도관찰사,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 신여길(申汝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신상철(申尙哲)이고, 아버지는 현감 신항구(申恒耉)이며, 어머니는 증 영의정 허한(許僩)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0년(현종 1) 사마시를 거쳐 같은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지평·홍문관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 왜인(倭人)이 왜관을 옮겨줄 것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자, 모두가 피하였는데도 신후재만이 이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무마시켰다.

그 뒤 1673년 부모 봉양을 위하여 안동부사로 나갔고, 1677년에는 병조참의·동부승지·지제교를 거쳐,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이어 1679년 (숙종 5)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제거당할 때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정원우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은 겸 진주주청사(謝恩兼陳奏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92년 도승지·강화유수·개성유수 등을 거쳐 이듬해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소론이 집권하자 여주에 유배되었다. 1697년 석방되었으나 충주 오갑장(鰲甲庄)에 은퇴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시문집 『규정집』 7권이 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청선고(淸選考)』
『성호문집(星湖文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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