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 신여길(申汝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신상철(申尙哲)이고, 아버지는 현감 신항구(申恒耉)이며, 어머니는 증 영의정 허한(許僩)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를 거쳐 같은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지평·홍문관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 왜인(倭人)이 왜관을 옮겨줄 것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자, 모두가 피하였는데도 신후재만이 이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무마시켰다.
그 뒤 1673년 부모 봉양을 위하여 안동부사로 나갔고, 1677년에는 병조참의·동부승지·지제교를 거쳐,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이어 1679년 (숙종 5)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제거당할 때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정원우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은 겸 진주주청사(謝恩兼陳奏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92년 도승지·강화유수·개성유수 등을 거쳐 이듬해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소론이 집권하자 여주에 유배되었다. 1697년 석방되었으나 충주 오갑장(鰲甲庄)에 은퇴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시문집 『규정집』 7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