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책. 목판본. 1927년 장조현(張祚鉉) 등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김형모(金瀅模)의 서문과 권말에 장석영(張錫英)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사부(詞賦) 3수, 시 163수, 권2에 서(書) 7편, 서(序) 2편, 제문 6편, 잡저 2편, 권3은 부록으로 만사 14수, 제문 3편, 행장·묘갈명·묘지명·봉림서원봉안문(鳳林書院奉安文)·상향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장현광(張顯光)·곽재우(郭再祐) 등 당시의 명공 석학들과 화창(和唱)한 것이 대부분으로, 나라를 걱정하여 장렬한 포부를 품은 서정시가 많다.
서(書) 중 진휼어사(賑恤御史)에게 보낸 서한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3년째 되던 해 인동(仁同) 주민들이 기아 상태에 빠져 사방으로 분산되자 구호 양곡을 요청한 것이다. 또, 순찰사에게는 모종을 인동 백성들에게도 주어 파종할 수 있도록 간청하고 있다.
잡저에 「부지암정사양복문(不知巖精舍樑腹文)」은 낙동강가의 명승지로 알려진 부지암은 장현광이 도학을 강론하고 후진을 양성한 곳임을 밝히고, 장현광의 제자인 김종효(金宗孝)·장내범(張乃範) 등 15인이 상의하여 정사를 지을 때 대들보 속에 비치한 기록문이다. 1610년(광해군 2)에 저자가 썼음을 밝히고 있다.
「창의조약(倡義條約)」에는 임진왜란 때 김성일이 초유사(招諭使)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리자 이에 호응하여 향병대장(鄕兵大將) 김해(金垓)와 함께 향병을 일으킬 때 작성한 조약문이다. 군량미 수합과 수송·군기정비·대오편성(隊伍編成)·군율에 관한사항 등 9개 조항을 열거하였다. 대장·부장·장서(掌書)·군량도총(軍糧都摠)과 예안·안동·예천·의성·인동 등 각 고을의 정제장(整齊將) 24인의 명단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의병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