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홍의 역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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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1629년(인조 7) 11월북도(北道)에 귀양가 있던 양경홍이 후금과 내통하여 역모하려다 발각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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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29년(인조 7) 11월북도(北道)에 귀양가 있던 양경홍이 후금과 내통하여 역모하려다 발각된 사건.
내용

군관(軍官)으로서 북도에 유배되어 있던 양경홍은 배소에서 젊었을 때 후금에 포로가 되었던 적이 있는 양계현(梁繼賢)과 내통하고 동관(潼關)의 후금군관 노돈무(盧敦武)와 연락을 취하여 후금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꾀하려 하였다.

이 때 양경홍과 함께 북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경상도로 옮겨진 진명생(陳命生)이 이를 고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경홍과 관련자들인 신상연(申尙淵)·한회(韓會)·정운백(鄭雲白)·최배선(崔拜善)과 양계현의 아버지 양사복(梁嗣福)은 처형되었고, 한옥(韓玉)·임길후(任吉後)·김이일(金以一)·정운서(鄭雲瑞)는 장살(杖殺)되었으며, 임흥후(任興後)는 귀양간 곳으로 되돌려보내졌으며, 임기지(任器之)는 영암으로 귀양가게 되었고, 정게(鄭垍)는 망명하려다 잡혀 처형되었다. 진명생은 고변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가자(加資)되었고 처형자들로부터 몰수한 노비와 전답이 하사되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집필자
김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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