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촌 ()

촌락
개념
바다나 호수, 하천에서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어촌은 바다나 호수, 하천에서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전통적으로 자생적 협동조직에 기초하여 가난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생업 활동을 전개한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어촌은 어업의 산업화와 새로운 어업 기술의 도입, 어업 환경의 변화,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한 사회적변화, 국가정책과 제도의 변화에 따라 전반적인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어로 관행의 변화, 외국인 노동자 고용에 의한 어로 행위의 변화 및 어촌의 다문화 마을로의 변화, 관광수요의 증대에 따른 어촌의 관광지화 경향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정의
바다나 호수, 하천에서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
개설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이고 내륙의 산지와 평원 사이에 형성된 강과 호수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해안과 내륙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동해 및 서해, 남해 삼면 바다의 해류와 해수 온도, 해안선의 지형, 간조와 만조의 차, 수심 등의 차이가 뚜렷한 입지적 특성을 배경으로 서식하는 다양한 종류의 수산물과 이에 따른 다양한 기법의 어로 행위에 의존하여 어촌이 발달하였다. 강이나 호수, 늪, 저수지 등에 인접한 곳에서는 내수면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자원을 획득하면서 농사와 병행하는 형태의 마을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어촌은 경제 행위에 있어서 어업에 전념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는 반농반어촌(半農半漁村)이 일반적이다.

해안과 내륙의 어촌은 바다와 내수면의 독특한 생태 환경과 생업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규범과 제도, 그리고 다양한 유형의 연결망을 발달시켰다. 이 마을들은 전반적으로 육지의 마을들과 다른 조건을 가진 해양과 내수면을 생업의 터전으로 함으로써 가족과 친족, 사회 조직, 경제 행위, 의례 및 신앙에서 독특한 제도와 문화를 발달시켜 왔다.

2021년 현재 전국의 어업 가구는 43,327가구이며, 어가 인구는 93,798명, 어업 종사 가구원은 72,503명이다. 이는 어가 인구가 1967년에 1,477,000명, 1980년에 844,000명, 1990년에 496,000명이었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어업 인구가 그동안 큰 폭으로 감소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시도별로 보면 어업 가구, 어가 인구 및 어업 종사 가구원 수의 삼분의 일 이상은 해안선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고 다도해의 수많은 도서가 위치한 전라남도에 거주한다. 최근에는 어업의 산업화와 새로운 어업 기술의 도입, 어업 환경의 변화,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한 사회적 변화, 국가 정책과 제도의 변화에 따라 어촌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가 수반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어로 관행의 변화, 외국인 노동자 위주의 어로 행위의 변화 및 어촌의 다문화 마을로의 변화, 크게 증대된 관광 수요에 따른 어촌 관광지화의 경향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역사

어로 행위는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생계 활동이다. 한반도에서도 구석기시대부터 해안과 내수면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류와 패조류가 당시의 인류에게 주요 식량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업에 의존한 집단 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패총(貝塚) 유적에서부터 발견된다. 한반도의 연안과 강변에서 버려진 조개껍질과 폐품으로 이루어진 유적인 패총은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패총에서 낚싯바늘, 작살, 어망추와 같은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당시 어로 행위는 패조류의 채집뿐만 아니라, 낚시망어업(䰶魚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포경 어업까지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울주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부터 어업이 활발했음을 잘 나타낸다. 농업이 주업으로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강변과 연안에 어업, 농업 및 수렵 채집을 병행하는 집단 주거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사회에 존재한 어업과 어촌에 관한 내용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전에는 예와 옥저, 삼한 등지로부터 해산물이 유입되어 조공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과 고구려에서는 어량(魚梁) 어업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 삼국사기』에는 좋은 어장을 점한 백제가 수산물과 비단을 중국과의 교역품으로 사용했으며, 신라는 탈해왕이 낚시를 생업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설화에서는 해조류의 채취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 해동역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나잠어업(裸潛魚業) 등 바다에서 하는 어업이 발달하였다고 하여 해조류의 채취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상의 이런 내용을 통해 고대사회에 연안과 강변 등지에서 어로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어로 활동은 『 고려도경』 및 『 고려사』, 『 고려사절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헌에서는 신분에 따른 해산물의 섭취와 어업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나라 연안에서 수확하는 수산물의 전반을 망라하고 있었다는 것과 어량 어업이 크게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이 공동의 생업 활동을 하는 어량소(魚梁所)나 곽소(藿所), 망소(網所)와 같은 집단 거주지를 통해 어량 어업, 미역류의 해조류 채취 및 어선 어업을 전문으로 하는 마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어업 경영 형태는 국가와 기관이 관리하는 어장과 어민이 관리하는 어장으로 구분되었다. 어민이 관리하는 어장은 본질적으로 어촌 공동체에 의한 공동 경영의 형태였는데, 점차 권세가들에 의한 사적 점유가 늘어 갔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와 권세가에 의한 가혹한 봉건적 수탈과 더불어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영향에 따른 금어조처(禁漁措處), 그리고 고려말 극심했던 왜구의 침탈로 인해 고려시대에는 어업 활동이 상대적으로 미진하였다.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금기시하여 여러 차례 금어조처를 취했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압하는 국가 정책, 인구 증가에 따른 수산물 수요의 증대, 어로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해 어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어촌도 활성화되었다. 이는 『 조선왕조실록』 및 『 신증동국여지승람』, 『임원십육지』, 『 자산어보』 등의 문헌에서 어획물의 종류가 오늘날과 유사할 정도로 다양하고, 어량의 분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각종 해세(海稅)가 크게 증액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어량 어업과 더불어 어망 어업도 연안에서 성행하였으며, 내수면 어업에 관한 기록도 많이 발견되는 사실을 통해 해안은 물론 강변이나 호안(湖岸)에 소재한 내륙의 어촌에서도 어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동안 연안의 어자원이 풍성했던 여건도 어업과 어촌의 활성화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어망 어업이 발달하면서 수확량도 증대되었고, 명태와 조기, 청어, 대구, 멸치, 새우가 많이 잡혀 6대 어업으로 분류되었다. 이들 어종이 포획되는 지역을 살펴볼 때, 한반도의 전 해역에서 어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해안의 지형에 따라 어량 어업은 주로 서해안에서 성행하였고, 동해안에서는 어망 어업이 활성화되었다. 당시의 어량 어업과 어망 어업은 대부분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서 이루어졌으며, 어선은 연해 어업에 적합한 소형 어선이 주를 이루었다. 제주도에서는 해녀들에 의한 나잠업이 성행하였으며, 남해 지역에서 해태 양식업도 이루어졌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연해 어업이 성행한 것은 연해 지역에 많은 어촌이 존재한 사실을 전제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해안 지역을 국경으로 간주하여 바람직한 삶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어업을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모든 해역에서 많은 어촌이 존재한 것은 해안을 따라 촘촘히 존재했던 수영(水營)과 관련된다. 수영은 해안 관방(關防)에 우선하고 지역의 세수(稅收)와 지역민의 역(役)을 관장하면서 배후 생활권의 중심지로 기능함으로써 어업과 어촌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각기 경상좌수영과 경상좌병영 소속의 능로군과 염간(鹽干)의 신분으로 울릉도독도에서 어로 활동을 한 배경도 각 영에 부과된 어패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던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선 후기에 대규모 어업과 수산물 유통 체계의 발달이 어업과 어촌 활성화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풍성한 어자원과 어로 기법의 발달에 따라 연안 어업이 활성화되면서 어종에 따른 포획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에 해상에서 열리는 어시장인 파시(波市)가 형성되었다. 서해안에서 조기 어장이 형성될 무렵에는 전국에서 수백 척의 어선이 모이는데, 이동하는 조기를 따라 흑산도, 위도, 연평도에서 대규모의 파시가 형성되었다. 이때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어민과 상인을 상대로 숙박업과 음식업이 성행하였다. 수산물의 생산 및 유통과 관련하여서도 창고업과 위탁 판매업, 운송업, 은행업, 숙박업을 동시에 담당하는 객주와 여각이 발달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산물의 생산과 유통이 발달하였음에도 어업은 여전히 가족 중심의 어가 경영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일부 규모가 큰 어장 어업과 공유 어장은 몇몇 영세 어가들 사이에서 협력적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개항 이후 강압적인 상황에서 체결한 「조일통어장정」(1899년), 「한일어업협정」(1908년)은 한반도의 어업과 어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말 왜구의 침탈 이후로 지속된 일본 어선의 한반도 해역에서의 어로 행위는 근대기에 체결한 일련의 조약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에 통제된 형태로 이뤄지던 일본 어선의 어로 활동은 한반도 전 해역에서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일본인 이주 어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정착 어업도 보편화되었다. 한반도 일본인 이주 어촌의 형성은 당시 일본의 진전된 어로 기술이 초래한 일본 어장에서의 극심한 경쟁 상황 속에서 관청과 권력 기관의 지원을 받으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인 어민 가족의 정착을 위한 주택, 작업장, 창고, 선양장 등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이주민에 의한 어업이 성행했던 어촌 지역은 학교와 관공서는 물론 금융 기관을 비롯한 각종 상가가 조성되어 근대식 항구를 중심으로 한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동력선과 진전된 어로 기술을 갖춘 일본인 이주 어촌의 확산은 기존의 영세한 한국 어촌의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인 어가와 한국인 어가의 민족과 계급에 따른 차이를 공고히 하였다. 영세성을 면치 못한 식민지 어민들은 수산물의 생산, 가공 및 유통 영역까지 침탈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규모 어업에 저임금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제도와 기술, 자본의 우위를 점한 일본인들이 식민지 어촌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채 경제적 기회를 확대해 나가면서 한반도의 어촌에는 정치 및 경제, 사회의 이중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어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었으나 시설과 장비, 기술, 자본이 부족하고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 이후 경제 부흥 과정에서 어업 인구는 1954년에 420,000여 명에서 1960년에는 560,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수산물 생산량은 어업 인구의 증가에 미치지 못하여 어가도 여전히 영세성을 면하기 어려웠다.

1962년에 「수산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마을별 하위 조직으로 어촌계가 구성되었다. 어촌계는 협업에 기초한 어민들의 공동 관리 체제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어촌의 자생적 협동 조직체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진다. 이와 동시에 개별 어가의 생계와 관련된 경제적 조직의 특성도 지닌다. 어촌계는 어촌 사회에서 생활 문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1960년대 이후 연근해 어업, 양식업 및 원양어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어업 인구도 크게 증가하여 1960년대 중반에 1,500,000명에 달하였고, 생산량에 있어서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이르렀다. 이후 수산물에 대한 수요가 커짐에 따라 해조류와 어패류의 양식업이 큰 폭으로 증가하여 어가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전되고 농어촌 지역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심화되면서 어촌 지역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전통적인 어로 관행이 변화하고 어업 노동력은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어업보다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이 성행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어촌 지역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관행과 풍속의 전승이 잘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으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어로 활동과 관련하여 생산 활동 및 신앙 행위의 측면에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반영한 관습과 관행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전승되고 있다. 육지가 아닌 상대적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업 활동과 공동체 신앙을 포함한 일상에서의 협동 관행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타의 생태학적 배경을 지닌 환경에 비하여 위험성과 불확실성이 높은 어촌 지역은 다양한 삶의 실천이 수반하는 역동적인 상황의 분석이나 전통적 생활 양식을 규명하기에 적합한 여건을 지닌다. 이러한 양상은 마을의 입지, 가족과 친족 그리고 어촌계 등의 사회 조직, 몫 나누기의 경제 행위 및 별신굿동제와 같은 민간 신앙의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어촌은 대부분 해안과 도서 지역에 있으며, 강이나 호수, 댐, 늪지 주변에서 내수면 어업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해안과 도서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어업이 크게 발전한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어촌은 협소한 규모의 주택이 밀집한 집촌(集村)을 이루고 있다. 특히 평야가 발달하지 못한 동해안에 소재한 어촌은 바다에 임한 비탈에 협소한 주택이 밀집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어가와 어촌의 영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어촌이 전통 사회에서 가난하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생업 터전이었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촌 공유 자원의 획득과 분배에 관한 전통적인 어업 공동체의 특성에 기인하고 있다. 내륙에 소재한 어촌의 경우 전통적으로 농업에 비중을 많이 두는 형태로 어업을 병행함으로써 농촌 일반의 마을 입지를 취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어촌의 가족 구성과 규모는 농촌에 비해 단조롭고 작은 규모를 이루었으며, 친족 관계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전통 사회에서 어업은 많은 식구를 부양할 만한 경제력을 수반하지 못하였고, 공유 어장에 대한 권리를 가구 단위로 부여하는 관행이 분가를 조장함으로써 어촌의 가구는 농촌과 비교해 가구의 규모가 작았다. 일반적으로 어촌에서는 족계 창립, 누정과 재실 건립, 족보 편찬, 서원과 사우의 건립, 정려 포장 및 증직을 위한 활동과 같은 문중 활동이 반촌이나 농촌에서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통 사회에서 어촌은 바람직한 삶의 터전으로 인식되지 않았기에 명문가의 정착이나 세거지의 형성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화 등으로 인한 피신과 은거의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문중 조직의 발달이 미비하고 문중 활동도 일반적으로 선영 관리와 묘제 수행의 정도에 머물고 있다.

전통적으로 어촌 사회에서는 농촌 사회와 마찬가지로 동계(洞契), 동회(洞會)와 같은 행정적인 성격의 조직과 이웃 간의 친목과 상호 부조 및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한 결사체가 존재했다. 특히 어촌에서는 어로 활동과 관련하여 예로부터 자치적 공동 관리 체제로 존속한 자생적 협동 결사체와 유사한 성격의 어촌계가 존재하고 있다. 어촌계는 낙후한 생산력에 평등성을 바탕으로 공유와 협력으로만 생산 활동이 가능한 어장을 자치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입호제도에 기초하여 지선 어장을 총유로 관리하는 동계의 성격을 지녔다. 어촌계는 영세한 개별 어가의 생계와 관련된 경제적 성격과 협력에 기초한 어촌의 공동체적 성격이 잘 반영된 사회 조직이다.

바다라는 거친 환경 속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위험 요소를 수반하는 어로 활동에 종사하는 어민들은 동제, 별신굿, 뱃고사와 같은 종교적 의례를 통해 불안을 해소하고 심리적 안정을 도모해 왔다. 어촌 지역에서 종교적 의례가 많이 행해지는 것은 세계의 거의 모든 어촌 지역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현상이며, 그만큼 어촌 생활의 불확실성이 높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민간 신앙을 비롯한 전통문화가 점차 사라져 가는 오늘날에도 어촌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민간 신앙의 전승이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다.

어촌의 변화

전통적으로 자생적 협동 조직에 기초하여 가난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생업 활동을 전개한 어민들의 삶의 터전인 어촌은 한국 사회의 산업화를 계기로 양적인 성장과 더불어 생활 양식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1950년대 말엽에 연간 수산업 총생산량은 40만M/T이었는데, 1970년대 중반에는 200만M/T이었으며, 2020년에는 370만M/T을 상회하였다. 어가 소득은 2020년에 가구당 5,000만 원을 넘어섰다. 산업화의 진전으로 소득이 증대되고 어패류에 대한 소비가 급증함에 따라 바다는 물론 내수면에서 양식업이 크게 성장하는 등 자연에 의존하던 어패류의 생산은 전문화되고 있다.

그러나 환경오염과 남획에 따른 어자원의 고갈, 국제 협약에 따른 연근해 어업의 쇠퇴, 수산물 수입의 증대 등으로 어촌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다. 더욱이 후기 산업화의 국면에서 농어촌 지역에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진행되면서 어민이 처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미 한국 사회의 여타 산업 부분과 마찬가지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실질적인 노동력의 상당 부분을 외국인 노동자가 차지하고 있다. 또한 공동체 협력 조직으로서 어촌계의 성격도 변화함에 따라 과거처럼 어로 활동의 현장으로서 어촌 지역이 지니는 고정적 이미지도 해체되었다. 현대 한국에서 어촌은 외국인 노동자 및 혼인 이주 여성과 공존하는 다문화의 현장으로서, 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관광지로서, 나아가 지역 개발을 둘러싼 다양한 욕망이 분출하고 충돌하는 정치 및 사회적 현장 등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최근에는 침체되고 있는 어촌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는 선착장, 물양장, 공동 작업장, 상하수도 및 정화 시설 등의 확보와 개선에 의한 어촌의 생산성 제고와 생활 환경의 개선이 포함된다. 이와 더불어 어촌관광단지, 해양테마파크, 해양생태공원, 박물관과 전시관의 조성과 같은 대규모의 지역 개발 계획이 포함되고 실행되고 있는 점도 크게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현대 한국의 어촌 지역은 커다란 변화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 편저, 박성용 외, 『울릉도·동해안 어촌지역의 생활문화 연구』(경인문화사, 2005)

논문

이창언, 「남해안 어촌지역 해양문화자원의 보존과 활용-경남 거제시 구조라리를 중심으로」(『민족문화논총』 5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3)
이창언, 「생활사자료의 보존과 활용: 경상북도 동해안 어촌지역을 중심으로」(『민족문화논총』 61,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5)
한상복, 「농촌과 어촌의 생태적비교」(『한국문화인류학』 8, 한국문화인류학회, 1976)

기타 자료

한상복, 「한국의 어촌과 어업에 관한 인류학적연구」(『학술연구보고』, 문교부, 1968)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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