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지구에서 육지를 제외한 부분으로, 짠물이 괴어 하나로 이어진 넓고 큰 공간이다. 지구 표면의 70.8%를 차지하며, 그 면적은 3억 6100만㎢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황해는 천혜의 대륙붕이며 남해는 좁은 해협이고 동해는 깊은 심해의 특징을 보인다. 예부터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이용해 왔다. 그 때문에 바다와 관련한 신화와 전설, 금기와 신앙, 의식과 놀이 등이 다수 존재하며, 문학작품의 소재로도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주로 해양교통의 수단이던 바다는 이제 해양자원의 보고로 주목받고 있다.
지구표면의 70.8%를 차지하며 면적은 3억 6100만㎢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다. 코흘리개 삼척동자도 실제로 바다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면서 삼면이 바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는 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바다에 친근하고, 또 그 중요성을 인식해 왔다.
우리의 식탁에는 하루 한끼도 거르지 않고 적어도 김 한 조각 또는 생선 반 토막이라도 오르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우리들 마음 속에 형성되어 있는 바다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친근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이런 경향은 필시 우리 민족의 뿌리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본래 넓은 대륙을 말을 타고 달리던 기마민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국토가 삼면이 바다라고 곧잘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바다를 개척하거나 바다에서 모험을 하거나 도전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 민족 중에도 가끔 바다를 정복하여 위명을 떨친 장보고(張保皐) · 이순신(李舜臣) 같은 몇몇 훌륭한 분들이 있으므로, 우리에게도 바다를 개척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증명된다.
더욱이, 오늘날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지혜를 총집결하여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까지 해양개발전략의 장기계획을 세우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하여 우리나라 연근해의 자원개발은 물론, 남극대륙 주변 해양을 포함한 세계의 오대양에 우리의 관심을 쏟으려 하고 있다.
이에 해양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해양개발의 방향, 해양의 이용방법, 현재까지의 해양이용실태 등을 소개하고, 또한 우리 민족과 바다 사이에 얽힌 갖가지 신화나 전설 · 놀이 및 예술작품에 나타난 바다, 바다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 등을 살펴본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남북으로 약 1,000㎞, 동서로 평균 200㎞의 너비를 가진 아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동 · 남 · 서 삼면이 바다와 접하고 북쪽이 만주대륙에 붙어 있다. 동해와 접하는 해안선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남해안 · 서해안은 이른바 리아스식 침강해안으로 해안선 굴곡이 심하여 좋은 해안지형을 만들고 있다. 다만,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석지(干潟地)가 발달하였으나 해운 · 항만 등에는 다소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단순한 해안선에 비하여 비교적 많은 섬들을 가지고 있는데 섬은 제주도를 위시하여 총 3,418개(유인도 831개)에 달하며, 그 대부분이 남해안과 서해안에 밀집되어 있다.
우리나라 주변 바다의 해저지형은 비교적 단순하다. 서쪽의 황해는 남으로 남해에 이어지나 경사가 완만하고 최대수심 80m 미만의 천해(淺海)이다. 해저지형경사는 중국대륙 쪽이 우리나라 쪽보다 훨씬 완만하고 최심부는 우리나라 쪽에 접근해 있다. 남해안은 대한해협에 면하고 있으며 황해와 마찬가지로 완만한 천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한해협의 너비는 약 200㎞, 평균수심은 약 100m이며, 최대수심은 대마도(對馬島)의 서쪽이 약 130m이다.
동해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해나 대한해협과는 전혀 다른 해저지형을 하고 있다. 동해안은 단순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나 해저지형의 경사는 대단히 급하다. 대륙붕은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으며 수심은 2,000∼3,000m에 달한다.
동해의 해저지형은 크게 3개 분지로 나누어지며, 동해의 중앙부에 야마토퇴(大和堆)가 높이 솟아 있다. 야마토퇴의 북쪽에는 3,000m 이상의 평탄한 일본해분이 있으며 이곳의 최심부는 4,049m이다. 야마토퇴의 남쪽에는 야마토해분(大和海盆)이 있으며, 서남쪽 대한해협으로부터 동해로 진입하는 입구에 대마해분이 있다. 한반도의 동해안에서 야마토퇴쪽으로는 비교적 깊지 않은 1,500m 정도의 해대(海臺)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것을 한국해대라 부른다.
이와 같이, 동해는 작은 지중해라 할 수 있으나 심해성지형을 나타낸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에 직접 접하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나라 수산 · 해운 활동이 활발한 연근해들을 빼놓을 수 없다. 즉, 남쪽의 남해를 위시하여 더 남쪽으로 태평양과의 관문이 되는 북서태평양을 들 수 있으며, 북쪽으로 오호츠크해 · 베링해도 우리의 해양활동의 발판과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 주변 해양의 해황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나라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황해 · 남해 · 동해는 해양학적인 면에서 볼 때 대단히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앞서 해저지형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황해는 천해의 대륙붕이며 남해는 좁은 해협이다. 한편, 동해는 깊은 심해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고, 해수(海水)의 성질까지도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황해의 해수는 염분이 매우 낮은 것이 특징이다. 황해는 중국대륙에서 흘러나오는 양쯔강(揚子江) · 황하(黃河) 등의 영향으로 바다 색깔이 황색을 띨 뿐만 아니라 해수가 희석되어 평균염분은 30∼33% 정도로 낮다. 특히, 하절기 장마철에는 강우에 의해 표면해수의 염분은 더욱 낮아지게 된다. 황해와 남해 사이의 경계는 불확실하지만 대략 제주도와 양쯔강 하구를 잇는 선을 경계로 한다.
황해는 겨울철에 표면이 냉각되면 무거워진 표면해수가 밑바닥까지 침강하여 활발한 연직혼합(鉛直混合)을 일으키므로 약층(躍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봄 · 여름 · 가을에 걸쳐 표층이 가열되면 20∼30m 깊이에 계절약층(seasonal themrocline)이 발달한다. 계절약층 위의 혼합층은 바람에 의하여 끊임없이 혼합되어 균일한 고온층을 이루고, 약층의 아래는 동절기에 만들어진 10℃ 미만의 찬 냉수가 남아 있다. 이 냉수를 흔히 황해냉수라 부른다.
남해, 즉 대한해협의 해수는 고온 · 고염의 아열대해수이다. 하절기의 대한해협은 황해와 마찬가지로 상 · 하 두 층으로 나누어진다. 상부혼합층은 남해 해역에서 만들어진 저염의 해수가 차지하며, 하부층은 구로시오(黑潮)의 중간부분(200∼500m)에 근원을 둔 구로시오 중층수라는 고온 · 고염의 해수가 차지한다. 겨울철에는 상하간의 계절약층은 없어지고 구로시오 중층수만이 남게 된다.
한편, 동해는 수심이 3,000m에 달하므로 해수의 특성 또한 특이하다. 대한해협을 통하여 동해에 유입된 대마난류는 대략 북위 40°선의 남쪽 전해역에 퍼지면서 북동진한 뒤 쓰가루해협(津輕海峽)을 통하여 북태평양으로 유출된다. 그러나 연직단면상에서의 분포를 생각하면 대마난류는 동해의 표면층만을 거쳐 흘러갈 뿐 400m 부근에 나타나는 주수온약층보다 더 깊은 심해층에 대하여는 별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동해의 심해층에는 동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성을 가진 해수가 존재하게 된다. 이 해수를 동해고유수라 하는데 염분이 34.0∼34.1%, 수온이 0∼1℃의 범위에 속한다. 이러한 특성의 해수는 북서태평양을 비롯한 어느 해양에서도 볼 수 없는 동해만의 독특한 것이다. 이 동해고유수는 동절기 연해주 연안에서 표면냉각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는 중위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경계적 특성이 강하다. 전반적으로 난류는 구로시오해류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며, 한류는 북쪽에서 남하하는 북한한류나 연안해수 등에 지배된다.
[그림 2]의 해류분포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발원한 구로시오해류는 류큐열도(琉球列島)와 일본 혼슈(本州) 남해안의 대륙사면을 따라 북동진한 뒤 태평양으로 진출한다. 구로시오는 구주(九州) 서남해상에서 일부를 분리시켜 북쪽으로 흘려보내는데 이것이 대마난류이다.
대마난류는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동해로 진입한 뒤 꽤 복잡한 유로(流路)를 나타낸다. 가장 안정된 유로는 대마도 남쪽을 통과한 뒤 혼슈 북쪽 해안을 따라 계속 북동진한 뒤 쓰가루해협을 통하여 북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대마난류 제3분지(分枝)(일본측에서는 제1분지라고 부름)라 한다.
다음으로 안정된 유로는 대마도 북쪽 서수도(西水道)를 통과한 뒤 우리나라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제1분지이다. 이는 흔히 동한난류하고 불리는 것으로 울릉도 부근에서 되돌아 남류(南流)한 뒤 제3분지에 합류한다. 제2분지는 제1 · 제3분지에 비하여 강약의 변화가 큰 것으로 제1분지와 같이 대마도 서쪽 해협을 통과한 뒤 울산 · 포항 부근에서 제1분지와 갈라져 동류(東流)하는 것이다.
어떻든 개략적으로 볼 때 대마난류는 동해에 진입한 뒤 대략 북위 40°남쪽에서 넓게 사행하면서 쓰가루해협으로 유출된다.
한편, 동해에 유입되는 한류는 타타르해협(Tartar strait)을 통하여 유입되는 리만해류에 근원을 두고 있다. 리만해류는 연해주해류에 이어지고 다시 북한해류로 연결되어 한반도의 동해안 남쪽까지 진출한다. 한반도의 동해안에 인접해서는 냉수가 출몰하여 동해안 일대에 저온의 기후를 만든다. 이 냉수는 북한한류의 남하와도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한난류의 성쇠 및 남동해안에 출현하는 용승현상(湧昇現象)과도 관련이 있다.
서해의 경우에는 해류의 뚜렷한 증거가 미약하다. 다만,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주도 서쪽을 흘러 북상한 구로시오해류의 일부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으며, 이것을 흔히 황해난류라 부른다. 일단 북상한 난류는 황해 북부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며 중국해안을 따라 남하한다고 알려져 왔다.
이는 해수의 수온 · 염분 분포 등에 근거를 두고 추론한 것으로, 직접 유속(流速)을 측정한 자료로는 인지할 만한 해류의 분포를 알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황해에 탁월한 해류가 존재하느냐에 관하여는 더 많은 연구 · 관측이 있어야 결론이 나리라 본다.
최근의 몇몇 연구들에 의하면 황해의 해수이동은 바람에 의하여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어떤 관점으로 보든간에 해류성분은 대단히 작음을 알 수 있고, 반면 조석작용이 활발하여 큰 조차와 조류를 나타낸다.
황해는 남쪽의 넓은 입구로부터 조석파(朝夕波)가 밀려들어오므로 많은 조석에너지가 축적된다. 황해에 진입한 조석파는 황해 내부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빙빙 돌게 된다.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은 등조시도(等潮時圖)를 그려보면 한 점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남해의 대한해협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마난류가 통과하는 좁은 수로이므로 전적으로 구로시오해류의 변동 및 주변 연안수의 영향을 받게 된다. 대한해협의 유속은 계절에 따라 상당히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5]는 이석우(李錫祐, 1969)와 히다카(日高, 1950)가 계산한 유속을 나타낸다. 겨울철에 20㎝/sec 정도이던 것이 여름에는 80㎝/sec로 연변화가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바다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바다를 이용해 왔다. 우선, 우리나라는 자연환경적인 면에서 바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기후이다. 우리나라는 편서풍이 탁월한 중위도에 위치하며 아시아대륙의 동쪽 변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황해가 서쪽에 있으므로 여러 가지 특징적인 기후를 나타낸다.
즉, 겨울에 한랭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습윤하다. 봄과 가을에는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이동성고기압과 저기압이 우리나라를 통과한다. 특히, 봄 · 가을에 통과하는 기상변동은 황해를 거쳐 우리나라에 상륙하게 되므로 비교적 습윤한 기후를 만든다. 이러한 기상변동과 함께 해안지방에는 소위 해양성기후의 특색이 나타나게 되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한편,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바다를 이용하고 정복하여왔다. 이용분야를 세목별로 나누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항해술에 익숙하여 멀리 중국 강남지방이나 필리핀까지도 진출한 기록이 있다. 신라 신무왕 때의 장보고는 약 1만의 수군을 거느리고 황해 · 남해 · 동해의 해적을 소탕한 뒤 해상활동을 완전히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의 활동영역은 발해만과 중국 연안을 비롯하여 구주 · 혼슈의 연안이 모두 포함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해상무역이 발달하여 우리나라의 이름이 처음으로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해양기술을 가장 크게 발휘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활약이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건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통적 해양국가인 왜국의 수군함대를 격멸한 것은 우리의 해전전략과 배를 다루는 기술이 그들보다도 월등히 능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해류와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한 대한해협에서 왜군과 싸워 이긴 것은 남해안의 수로와 해조류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해양진출능력을 본받아 최근 우리나라의 해운활동 또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지난 십수 년 동안에 우리는 해양진출의 업적을 쌓아, 수산업 · 조선업 및 해운업에서 세계 상위그룹으로 도약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조선업은 1970년대 초 세계 최하위그룹이던 것이 불과 십여 년 만에 쟁쟁한 유럽의 조선 선진국들을 물리치고 제2위의 조선공업국으로 급성장하였다.
우리 민족은 대륙민족성과 해양민족성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은 여러 역사적 사실로서도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식생활면에서 보아도 양면성을 느낄 수 있다. 세계의 여러 민족 중에서도 우리처럼 소 · 돼지 등의 육류와 생선 · 해초류 등의 수산물을 골고루 섭취하는 민족은 드물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대륙민족의 특성인 육류를 즐기는 민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양민족 못지 않게 수산식품을 좋아하였다. 우리의 식탁에는 조기 · 고등어 · 멸치 · 꽁치 등 생선류와 미역 · 김 등 해조류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수산업 · 어업에의 진출은 그 역사가 오래일 뿐더러 최근에는 세계 굴지의 수산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원양어선단이 활약하지 않는 바다란 생각할 수도 없다. 1962년 집계에 수산업 총생산량이 47만t이던 것이 20년이 지난 1982년에는 5.5배인 281만t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세계 제9위의 수산국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2000년대 우리나라의 인구는 6000만을 넘어서게 되는 반면, 농경지 면적은 현재의 약 60% 정도로 감소될 전망이며, 이미 우리의 식량자급률이 50% 미만으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들이 섭취하는 동물성 단백질의 60%를 공급하고 있는 수산물 비중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2000년에는 연간 430만t을 공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 수산업시장의 전망은 순조롭지만은 않다. 1982년 말 개발도상국들의 단결에 의하여 제정된 「신해양법」은 1988년부터 발효되어 일부 국가에서는 벌써부터 여러 가지 제재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을 타개하기 위하여 연안국들과 외교적 협상을 시도함과 아울러 국내적으로는 서남해안의 적합한 곳에 대단위 해양목장을 개발하여야 하며, 현재 해조류와 패류 중심의 양식을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 어종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1984년의 약 300만t(약 1조원) 정도의 수산물 생산이 2000년대 초에는 약 600만t(약 3조 3000억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토의 약 70%는 산악지형이므로, 농업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농경지의 절대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정책에 수반하여 임해공업용지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서해안 일대에 간척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간석지개발에 적합하다. 35만㎢에 달하는 대륙붕, 3,500여 개에 달하는 섬들, 수천 km에 달하는 긴 해안선뿐만 아니라, 썰물 때마다 노출되는 간석지는 앞으로의 간석지개발 전망을 밝게 하여준다.
정부가 2000년대 해안공간 이용계획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대단위 간척사업을 위시하여 천해부분을 개발함으로써 대단위 양식장 · 농경지 · 해상공장 · 공원 · 항만 · 관광단지 · 해상호텔 · 인공섬 · 해상비행장 등 다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생활공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공간확보는 현재의 기술로서도 충분히 가능하며, 수심 20m 미만의 해양을 개발할 경우 약 2만 7000㎢에 달하는 국토를 얻게 되는데 이는 현 우리 국토의 30%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해양자원이라 하면 수산업 · 어업 등이 모두 포함되겠지만, 여기서는 우리나라 주변 대륙붕개발과 관련된 탐사계획과 먼 장래의 심해저해양자원개발에 관한 설명에 한정하려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일공동석유개발을 비롯하여 황해의 해저에 묻혀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지하자원 탐사도 좀더 본격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현재 소비하고 있는 석유량은 연간 약 2억 배럴에 달하며 2000년대에는 3억 6000만 배럴에 이를 것이다. 이는 돈으로 환산하면 약 7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1986년 현재 총수입액의 25%이다. 또한, 기간산업에 필수적인 망간 · 니켈 · 코발트 등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수요는 점점 증가하여 2000년대는 약 3조 원 규모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자원을 조금이나마 확보하기 위하여는 대륙붕개발을 적극 추진함과 아울러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심해저 망간괴(manganese nodule)의 개발기술을 축적하고 심해개발의 기득권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저지하자원개발이란 현재의 산업기술수준에서 필요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양자원이란 결국 바닷물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닷물 속에는 막대한 염분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세계 소금생산량의 대부분은 광산의 암염으로부터 공급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천일염의 제조가 활발하였다. 서해안 지방에는 염전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주안 · 남양 · 아산만 등은 유명하였다. 소금을 비롯한 용존광물(溶存鑛物) 외 해수 자체도 해양자원의 가치를 인정받게 될 날이 멀지 않다. 물을 전기분해하여 얻어지는 수소와 산소를 태운다면 무진장한 녹색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해양에너지란 넓은 의미로는 해양에서 얻어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의미하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조석에너지 · 파랑에너지 · 염분차에너지, 온도차에너지 · 해류에너지 · 해양생물에너지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개발현황에 입각하여 살펴본다면 이들 중에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거나 가동중인 것이 있는가 하면, 너무 이론적이거나 비경제적이어서 실현성이 희박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첨단과학기술이 날로 발전하는 시점에서 보면 이런 것들이 모두 허망하거나 비경제적이라고 돌려놓을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우선, 우리나라의 조력발전계획은 경제성 · 타당성 조사를 완료하고 입지까지 선정한 상태이다. 1979년 조력발전 후보지 선정을 위한 제1단계 기초조사 결과에서 아산만 · 인천만 · 가로림만(加露林灣) 등이 결정된 바 있다. 그러나 그 뒤 원유가격이 대폭 하락하여 조력발전의 경제성이 낮아진 탓으로 계획추진이 조금 지연되고 있을 뿐 가까운 장래에 실현을 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실현성이 높은 것이 파랑에너지의 이용이다.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해양연구소는 1982년 우리나라 주변 해역의 파랑밀도를 계절별로 측정하였다. 구체적 계획단계에 들어가려면 좀더 대대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파랑에너지 이용의 조건은 구비하고 있다고 본다. 파랑으로부터 기계적 에너지를 추출하는 방법은 수많은 장치가 고안되어 실험가동중에 있다.
파랑에너지장치는 특히 해양목장이나 해양공원 등에 병행하여 설치함으로써 에너지원을 확보함과 아울러 소파효과(掃波效果)도 거둘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강한 해류나 조류가 흐르는 곳에서는 터빈을 설치하여 발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서해안에서는 조류가 강한 곳이 많으며 남해안에는 강한 해류가 흐르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왜군을 크게 무찔러서 유명한 울돌목은 조류의 세기가 10노트(5m/sec)까지 달하는 곳으로 발전(發電)의 후보지로 유망하다.
이상 설명한 기계적 에너지 외 바다의 표층과 심층 사이에 존재하는 온도차를 전기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 본래는 열대지방의 바다에 적합한 방법이지만 우리나라 동해안에도 비교적 적합한 곳이 있다.
동남해안을 따라 동한난류가 북상하는 해류의 온도단면을 보면 [그림 6]과 같다. 표층의 25℃ 이상의 따뜻한 물에 비하면 200m층에서는 1℃의 찬물이 나타난다. 따라서, 25℃ 정도의 온도차를 이용하는 터빈 발전기를 설치하면 막대한 양의 전기를 얻을 수 있다. 물론, [그림 6]은 8월달의 수온분포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겨울철에도 표면수온이 18℃에 달하므로 이용성은 대단히 크다.
온도차발전과 비슷한 원리를 이용하는 것으로 염분차발전을 생각할 수 있다. 하천이 바다로 유입하는 하구 부근에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 조경(潮境)이 형성된다. 조경을 경계로 염분차가 30%에 달하는 전선이 형성되므로 염분농도에 의한 삼투압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림 7]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구에 완충댐을 쌓아 완충호수 내의 담수를 반투성막을 통하여 바다로 뽑아내면 해면과 완충호수 사이에 낙차를 만들 수 있다. 30%의 염분차가 만드는 삼투압의 차이는 약 240m에 상당하는 낙차에 해당하므로 염분차는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게 된다. 다만, 이러한 압력에 견딜 수 있는 이상적인 삼투막을 개발하는 것이 선결문제로 남아 있다.
해양생물학적 에너지도 미래의 에너지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조류(藻類) 중에는 성장속도가 대단히 빠른 대형조류(great kelp)가 있다. 해수 중에 대형조류 양식장치를 부표(浮漂)로 고정시켜 놓고 영양염이 풍부한 심층수를 끌어올려 공급해 주면 해수면 1ha당 700∼1,200t에 달하는 조류를 생산할 수 있다. 이 조류를 발효시킬 때 발생하는 가스를 이용하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대형해양목장이나 양식장 등도 이러한 해조류의 생산에 활용할 수 있다.
이상 설명한 몇 가지의 해양에너지 개발방식은 우리나라에서 현재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기술수준으로도 개발 가능한 현실성이 강한 과제들이다. 이러한 에너지원들은 그들 하나하나가 별도로 설치, 가동되기보다는 여러 방법을 병설함으로써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뿐더러 효율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해양에너지가 적극 개발될 경우 2000년대에는 우리나라 총에너지 수요의 10% 정도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신화에는 바다가 처음 어떻게 생성되었는가에 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선인들이 생활의식이나 교양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삼황기(三皇紀)나 열어구(列禦寇)의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및 유안(劉安)의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복희(伏羲)의 누이인 여와(女媧)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동남풍의 천신(天神)인 공공(共工)이 황제의 손자인 전욱(顓頊)과 제왕의 자리를 다투다 지게 되자 화를 내고 서북방에 있는 불주산(不周山)을 머리로 받아 무너뜨리니, 하늘을 괴고 있던 하늘기둥[天柱]이 부러지고, 땅을 잡아매었던 땅줄기[地維]가 끊어져 하늘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해와 달과 별들도 서북쪽으로 옮아갔고, 땅은 동남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갈갈이 갈라져 하늘에서 계속 쏟아지는 빗물도 동남쪽으로 흘러들어 모이게 되었다.
이에 여와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검은 다섯 가지 빛을 띤 돌을 다듬어 갈대를 태운 재를 이겨 구멍난 하늘을 메우고, 큰 자라의 네 발을 가지고 땅의 네 기둥을 세워 기울어진 땅도 평평하게 보수를 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하늘과 갈라진 땅과 흘러내려 한 곳에 모인 물들은 복구하지 못하여 이 물들이 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삼일째 작업으로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물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바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노르웨이 등 전세계에 널리 흩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바닷물은 왜 짠가?’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거의 같은 양상으로 전해온다. 내용은 화수분 맷돌을 가진 소금장수가 자기의 소금배에다 그 맷돌을 실어놓고 소금을 나오게 한 뒤 바다를 건너다가 소금이 더럭더럭 나와서 금새 배에 가득 찼으나 멈추게 하는 법을 미처 익히지 못하여 마침내 배가 전복되어 바다에 침몰해 버리니, 이때부터 맷돌은 바닷속에서도 계속 소금을 생산해 내어 바닷물이 짜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된 금기가 있다. ① 낚싯배이건 그물배이건 제사 때는 물론, 여느 때도 여자를 배에 태우면 재수가 없다. ② 어장업이나 배사업을 하는 집에서는 개를 기르지 않는다. ③ 배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④ 출항하기 전의 선원은 여색을 금해야 한다. ⑤ 바다에 일하러 나가는 어부에게는 잘 다녀오라고 인사말을 하면 오히려 해롭다. ⑥ 그물을 머리에 쓰면 고기를 잡지 못한다.
또한, 우리 선인들은 해신의 존재를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 예는 일본행 사행(使行)들이 부산에서 배를 타기 전에 반드시 상하 · 노소 · 귀천 없이 해신제를 지낸 것을 비롯하여, 전남지방 해안이나 제주도 해안 도처에 해신을 모신 신당이 있다는 사실로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신앙화된 자연현상 몇 가지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정초에 남쪽 바다 갯벌에 파래가 새파랗게 많이 생기면 그 해는 바다에 바람이 세다. ② 정월 첫 무쉬(潮水가 조금 붇기 시작하는 물때)에 바람이 불면 그 해 바람이 세다. ③ 노을새가 섬에 자주 앉았다 날아갔다 되풀이하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분다. ④ 바다에서 꿈에 여자가 보이면 길하다. ⑤ 섬이 움직여 보이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다. ⑥ 바다에서 월식을 당하면 놋그릇을 두드리며 굿을 해야 한다.
지방에 따라 약간 다름이 있기는 하지만, 전남지방 해안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바다생활의식을 행하였다.
① 배내리기(進水式): 배를 만든 바닷가에서 새로 만든 배의 중앙에 자리를 펴고, 선주가 준비하고 도목수가 주관하되, 뱃머리를 산을 향하여 놓고 그곳을 향하여 고사(告祀)를 지낸다. 배가 완성된 뒤 밀물 때를 맞추어 날을 잡아 친지들이 보내온 술과 ‘축대어 · 진수축대어 · 대풍어’ 등의 글귀를 한자로 쓴 울긋불긋한 판기(또는 봉기) 20∼30개를 받아 배에 꽂고, 물이 들기 전에 상을 차려 도목수가 먼저 향산 재배하고 선주가 되풀이한 뒤 목수들과 노소인들이 같이 술을 마시고, 힘을 모아 배 밑에 둥근 나무를 깔고 배를 끌어 물에 띄운다.
② 선왕(船王)모시기: 2t 이상의 배면 낚싯배라도 다 모시는데 배내리기 의식 뒤에 이어서 선주가 모시며 반드시 조수가 들 때 모신다. 선왕은 ‘서낭’ 또는 ‘선령(船靈)’이라고 하는데, 5∼7가지 색옷을 만들어 여자 인형에 입혀 앞돛 · 중돛 밑의 선실 한쪽 벽에 상자를 짜서 모신다. 지방에 따라서는 여자 인형 대신 삼색 옷감이나 실 · 바늘, 여자 의복, 한지를 접어서 모시기도 한다. 이렇게 선왕을 모신 뒤 설날 · 상원 · 추석 등 큰 명절에서는 꼭 상을 차려 바치고, 그 밖에 개인의 성의에 따라 돼지머리 · 밥 · 술 · 해물 등을 차려 바친다.
③ 배굿(뱃고사): 고기잡이를 나가기 전이나 고기잡이가 잘 안 되거나 액운이 있을 때 액막이로 굿을 하거나 고사를 지낸다. 메짓기 화장이[火匠]만 그 날 목욕하고 음식을 차리며, 미리 당골이라는 무녀에게 부탁하여 당골이 혼자서 1시간쯤 징을 치며 빈다.
선주의 선산이나 해변에 배를 매고 그 위 선왕이 모셔진 곳에서 시작하여 중앙을 거쳐 배 끝쪽으로 지내는데 대체로 선왕이 주신(主神)이 되지만 때로는 당골이 점쳐 고기잡이가 안 되는 원인처를 찾아 지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배굿이나 고사는 용왕제 · 수신제 · 어신제 · 기어제(祈漁祭) · 낙망(落網)이라고도 하는 집단의식과도 별 차가 없다. 또, 우리 선인들이 전통적으로 바다에서 특별히 즐긴 놀이는 없었던 듯하다.
다만,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거나, 혹은 용왕제 같은 집단적 풍어제를 마친 뒤 용왕 · 선왕 · 잡귀들을 풀어 먹이며, 북 · 장구 · 꽹과리 · 징 등 사물(四物)을 사용하여 의식을 진행하는데 이를 외부인들이 흉내내어 놀 때 놀이가 되기도 한다.
현재 전하고 있는, 우리 선인들이 바다를 주제 또는 소재로 하여 남긴 문학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한시로 가장 오래된 것은 최치원(崔致遠)의 「범해(泛海)」이다. 그 전문은 “돛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오랜 바람 만리에 통하네/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애들도 생각나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중에 있네/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는 또 신선을 찾겠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蓬萊看咫尺 吾且訪仙翁)”이다.
한문 표해(漂海) 기록물로는 조선 성종 때의 최부(崔溥)가 제주에서 나주로 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 영파부(寧波府)에 표착하여 북경(北京)을 거쳐 의주 · 서울로 6개월 만에 돌아와, 성종에게 지어 바친 『표해록(漂海錄)』이 현전 5편의 표해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현전 표해기 중에는 1757년 4월 부산을 떠나 동해안을 끼고 강릉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북해도에 표착하여 에도(江戶) · 오사카(大阪)를 거쳐 부산으로 귀국한 이지항(李志恒)의 「표주록(漂舟錄)」이 있다.
또한 지은이의 해박한 지리상식과 재치있는 남녀 애정 경험을 잘 묘사하고 있는 장한철(張漢喆)의 「표해록」은 1771년 서울의 과거에 응시하고자 제주도를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류큐도(琉球島)에 표착하였다가 지나는 중국인과 월남인 상선에 구조되어 돌아온 기록이다.
그 밖에도 1801년 12월 소흑산도를 출발하였다가 폭풍을 만나 류큐도를 거쳐 필리핀을 지나 중국을 거쳐 의주 · 서울을 통하여 1805년 1월에 귀환한 어부 문순득(文淳得)은 정약전(丁若銓)과 유암(柳菴)에게 구술해 주어 10여 년의 간격을 두고 2편의 「표해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두찬(崔斗燦)은 제주에서 나주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영파부에 표착하여 뛰어난 글재주로 중국인들에게 우대받으며 북경 · 의주를 거쳐 귀환한 뒤 「승사록(乘槎錄)」을 썼다. 또, 가사(歌辭) 작품으로는 이방익(李邦翼)의 「표해가(漂海歌)」가 유명하다.
현대 문학작품으로는 김윤식(金允植)의 「바다로 가자」가 대표적인 자유시이고, 최남선(崔南善)의 「남해유초(南海遊草)」는 유명한 연시조이다. 또, 소설로는 정한숙(鄭漢淑)의 「이여도IYEU島」 와 천금성(千金城)의 「은빛갈매기」 등이 유명하다.
아직도 해안 어촌에서 불리는 민요로는 인천지방의 경우, 운반선의 무사안일을 비는 「배의 축원노래」와 「불사(不死) 굿노래」가 있고, 배를 새로 만들어 진수하며 부르는 「배치기노래」, 선왕을 모시며 부르는 「선왕굿노래」도 있고, 배가 출항하면서 부르는 「닻감기노래」 · 「노젓기노래」도 있고, 고기잡이하며 부르는 「그물내리는 소리」 · 「그물감기 소리」 등이 있다.
또,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인 조도 군도(群島)에는 고기잡이 출항을 하면서 그물을 싣는 노래인 「술비소리」와 그물을 싣고 행선고사(行船告祀)를 모신 뒤 떠나며 부르는 노래, 그물을 놓고 낙망(落網) 고사를 모시고 그물을 당기는 소리가 있고, 만선으로 포구에 들어와 돈을 벌어가지고 집에 돌아오는 기쁨을 노래하는 「풍장소리」도 있다.
풍장소리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얼시구 좋다. 절시구 좋와. 얼시구나 좋네.
헤헤 허야허아 허어 허어허어 좋와요.
칠산바다에 들어온 조구
우리배 망자(網子)로 다 들어왔다.
에헤 좋네.
(중략)
들물에 천냥, 썰물에 천냥
안안팟 네물에 사오천냥 실었다.
에헤 좋와요.
에헤 허아허아 허아 허아허아 좋와요.
(하략)
현재 애창되고 있는 우리나라 가곡으로는 현제명(玄濟明) 작사 · 작곡의 「희망의 나라로」, 석호 작사 · 조두남(趙斗南) 작곡의 「뱃노래」, 함호영 작사 · 홍난파(洪蘭坡) 작곡의 「사공의 노래」, 문병호 작사 · 권길상 작곡의 「바다」 등이 유명하다.
현전 문인화에는 바다를 그린 그림이 별로 많지 않은데, 심사정(沈師正)의 「해암백구풍범도(海巖白鷗風帆圖)」, 김홍도(金弘道)의 「해산선학(海山仙鶴)」 등이 조선시대의 유명한 바다 그림이다. 현대미술에 이르러서는 평화스러운 해중 고도를 그린 이대원(李大源)의 「여거도(與居島)」 등 여러 사람들의 그림이 많이 있다.
역대 한국인들은 지리적으로는 삼면이 바다이어서 해양 진출이 용이하지만,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해양영웅의 출현에 의하여 간헐적으로 빛나는 해양활동을 행한 바, 장보고 · 김방경(金方慶) · 이순신들의 전사(戰史)가 있을 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바다는 모두가 죽음을 약속하는 무서운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배따라기」에서는 “우리는 구태여 선인되어 타고 다니는 것은 칠성판이요, 먹고 다니는 것은 사자밥이라, 입고 다니는 것은 매장포로다.”라고 노래한다.
한편, 남해안 어부들이 부르는 「만선가」에서는 “올라온다. 올라온다. 우리 밥이 올라온다. 이 고기가 무슨 고기냐? 처자식과 우리 부모 맛줄 고기가 올라온다.”고 노래하여 바다를 화수분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또, 「표해가」를 지은 이방익은 “지낸 사실 글 만들어 호장한 표해 광경 후진에게 이르과저. 천하에 위험한 일 지내놓으니 쾌하도다.”라고 노래하여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지내놓고 보니 호쾌한 남아의 일이라는 기쁨과 만족감을 솔직히 진술하여 바다를 찬미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