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월여(月如). 이언사(李彦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신성(李愼誠)이고, 아버지는 이목(李楘)이며, 어머니는 황우(黃佑)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1년에는 태학 유생으로서 선조 추승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1636년에는 검열(檢閱)과 대교(待敎)를 지냈고, 1637년에는 봉교(奉敎)를 역임하였으며, 1638년에는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그 뒤 1643년에는 교리(校理)·수찬(修撰)·헌납(獻納)을 역임했고, 이듬해에는 교리·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1648년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1649년에는 대사간(大司諫)·대사성을 지냈다.
당시 집의(執義) 송준길(宋浚吉)에 의하여 권문(權門: 권세있는 가문)에 아첨하는 부패공직자라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하였으며, 조정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붕당을 짓는다고 낙인찍혀 유배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1650년에는 통정대부 이조참의 지제교 겸 춘추관 수찬관(通政大夫吏曹參義知製敎兼春秋館修撰官)으로서 삼방(三房: 과거를 볼 때 세 試官이 있던 곳) 당상(堂上)이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부제학(副提學)과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하면서 대동법과 관련한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그 해 간원에 의해 탐관오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특진관(特進官) 허적(許積)·동지경연(同知經筵) 조석윤(趙錫胤)·시독관(侍讀官) 홍명하(洪命夏)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