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의 도포 ()

영조대왕의 도포
영조대왕의 도포
의생활
물품
1740년에, 파계사 관세음보살상에 복장한 영조대왕의 도포.
이칭
이칭
청사상의(靑紗上衣)
물품
재질
변화 평견 직물
용도
불복장
소장처
파계사
제작 시기
1740년
내용 요약

영조대왕의 도포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을 개금(改金)하다가 발견된 18세기 대표적인 도포 유물이다. 함께 발견된 발원문과 도포 뒷길 안쪽에 부착된 한지 묵서를 통해 1740년(영조 16) 경신(庚申) 12월 11일에 영조대왕의 만세유전(萬歲流專)을 빌며 복장(服臧)한 옷임이 확인되었다. 색상이 보존된, 왕실의 불복장 유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11월 23일에 중요 민속 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어 파계사에 소장 중이다.

정의
1740년에, 파계사 관세음보살상에 복장한 영조대왕의 도포.
연원

영조대왕의 도포는 1979년 대구 파계사 원통전(圓通殿)관세음보살상주6 1점 발견되었다. 이 도포는 옅은 주7의, 성근 주8 직물로 만든 주9으로, 주10의 모양이 목판 주4형이고 두 층의 뒷자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주1에 의하면, 1740년(영조 16) 경신년(庚申年) 12월에 파계사의 대법당을 중수할 때 영조탱화 일천불을 주11, 이곳을 왕실을 위하여 기도하는 도량으로 삼고 영조대왕의 청사상의(靑紗上衣)를 주12 만세 유전을 빌었다고 한다. 도포 뒷길의 등 부분 안쪽에 ‘건륭 5년 경신 12월 11일 복장기 성상주 갑술생 이씨 청사상의 일령 만세유전간 파계사자동가원오상 삼전탄일불공처야(乾隆五年 庚申 十二月 十一日 服臧記 聖上主甲戌生 李氏 靑紗上衣 一領 萬歲流專于 把溪寺者國家願堂 三殿誕日佛供處也)’라는 한지 주2가 부착되어 있으며, 도포를 ‘청사상의’로 지칭하여 유물의 색상과 재질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 유물은 영조의 1740년 옷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색상이 남아 있는 도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복식 사료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1987년 11월 23일 ‘영조대왕 도포(英祖大王道袍)’라는 지정 명칭으로 중요 민속 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 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파계사에서 소장 중이다.

형태와 용도

도포는 왕 이하 사대부의 외출복이자 주28이었으며 또한 주14들의 옷이기도 했다. 형태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가 달린 옷인데 앞자락의 옆선에 달린 커다란 두 조각의 (이엽삼)가 뒷길 안쪽으로 들어가 뒷길 안쪽에 고정되거나 주3인 한판(汗版)에 고정되어 두 층의 뒷자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까지 주15주16의 다양한 구성을 보였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홑 도포로만 전해진다.

영조대왕의 도포는 옅은 쪽빛의 성근 평견 직물로 만든 홑 도포이다. 길이 130㎝, 주17 119㎝, 품 54㎝, 소매통 65㎝의 크기이다. 재질은 한 주18주19 두 올씩을 끼워 제직하여 경사가 두 올씩 몰려 있는 변화 주20인데, 시각적으로는 이경 주22주21와 유사할 정도로 성근 편이다. 주23주24이 목판 당코깃 형태이며 모시로 만든 동정이 달려있다. 소매는 넓은 두리소매 형태이며, 앞길 옆선에 삼각 형태의 무를 달았고, 연장된 좌우의 커다란 두 조각의 무(이엽삼)가 한판[어깨바대]이 없이 뒷길 안쪽에 직접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뒷자락의 옆도련은 약간 곡선으로 넓어지는 형이다. 영조대왕의 도포를 복장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된 한지 묵서는 도포의 뒷고대 안쪽에서 뒷길 아쪽 등부분까지 놓여져 꿰매져 있다.

당시 사대부가 입었던 도포의 깃은 대부분 칼깃인데 반하여 영조대왕의 도포는 목판 당코 주25이 달린 것이 특이한 점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호 중 광해군주5도 같은 깃 모양을 하고 있으며, 신경유(申景裕, 1581~1633)주26 도포 12점 중 2점의 도포만 목판 당코 깃의 형태인 것으로 볼 때 이러한 형태의 깃 모양은 당시 왕실을 비롯한 특권 계층의 특별한 형태임을 증명하는 단서로 볼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도포는 왕 이하 사대부의 외출복이자 의례복이었으며 또한 유생들의 옷이기도 했다. 도포의 명칭은 1564년(명종 19)에 처음 확인되는데, 조선 전기에는 도포의 체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17세기 중기 이후 도포의 체제가 안정되면서 직령을 대신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주27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영조의 아들 사도 주29의 부인인 혜경궁 주30가 쓴 『한중록(閑中錄)』(1795)에는 영조가 주31주32으로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 전기에 쓴 이규경『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 조관(朝官) · 사서(士庶)가 웃옷으로 도포를 입었는데, 청색과 백색 두 가지가 있어 좋은 일에는 청색을 입었고 평시에는 백색을 입었다. 천민과 노비층에서는 입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1884년(고종 21)에 고종갑신의제개혁으로 소매 넓은 옷을 폐지하고 착수포(窄袖袍)를 입도록 하였으나 유생들의 반발로 제사나 조문 등의 예복으로는 도포를 다시 허용함에 따라 지금까지도 전통 의례에서 대표적인 남성 의례복으로 착용되고 있다.

도포는 뒷자락의 모양이 두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지만 또 다른 특징으로 17세기 전기까지의 도포에는 앞길 좌우의 무인 이엽삼에 주름이 잡혀 있는 점이다.

도포 유물 중에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도포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이석명(李碩明, 1513~1583) 묘 출토 명주 겹도포, 임진왜란 직후의 강대호(姜大虎, 1541~1624) 묘 도포, 국립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김약(金瀹, 1559~1625) 묘 도포 등이다. 이들에서 이엽삼에 주름이 잡힌 도포가 확인되며, 이후의 도포에서는 주름이 없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영조대왕의 도포는 이엽삼에 주름이 없는 조선 후기의 도포에 해당한다.

의의 및 평가

이 도포는 왕실 관련 복식 유물이 소략한 상태에서 영조대왕의 1740년 옷이라는 기록이 더하여져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주33로서 형태와 색이 보존되어 복식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소매가 오랫동안 접혀진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접혀진 부분이 파손됨에 따라 2005년에 보수를 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安東地域 傳統服飾』(안동대학교박물관, 1996)
이순원·유효선·조우현, 『이석명(李碩明) 묘 출토복식 조사보고서』(서울대학교 박물관, 2000)
『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 2(문화재청, 2006)

논문

구남옥, 「조선시대 남자 복식에 나타난 목판 당코 깃 연구」(『服飾』 55-6, 한국복식학회, 2005)
이은주, 『道袍 양식의 발전에 대한 갈등·기능론적 분석)』(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주석
주1

신이나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글. 우리말샘

주2

먹물로 글씨를 씀. 또는 그 글씨. 우리말샘

주3

적삼의 어깨에 속으로 덧댄 조각. 우리말샘

주4

한복의 상의 부분에서, 여밈 끝이 버선코처럼 뾰족한 모양의 깃.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 유행한 깃의 모양이다. 우리말샘

주5

예전에,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가 소창옷 위에 덧입던 웃옷. 넓은 소매에 길이는 길고, 앞은 두 자락, 뒤는 한 자락이며 옆은 무가 없이 터져 있다. 우리말샘

주6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하다. 우리말샘

주7

짙은 푸른빛. 우리말샘

주8

평직으로 된 비단. 우리말샘

주9

한 겹으로 지은 옷. 우리말샘

주10

겉으로 드러난 옷깃. 우리말샘

주11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다. 우리말샘

주12

불상(佛像)을 만들 때, 그 가슴에 금ㆍ은ㆍ칠보(七寶)와 같은 보화(寶貨)나 서책(書冊) 따위를 넣다. 우리말샘

주14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선비. 우리말샘

주15

한 겹으로 지은 옷. 우리말샘

주16

솜을 두지 않고 거죽과 안을 맞붙여 지은 옷. 우리말샘

주17

저고리의 깃고대 중심에서 소매 끝까지의 길이. 우리말샘

주18

베틀, 가마니틀, 방직기 따위에 딸린 기구의 하나. 베틀의 경우는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살같이 세워, 두 끝을 앞뒤로 대오리를 대고 단단하게 실로 얽어 만든다. 살의 틈마다 날실을 꿰어서 베의 날을 고르며 북의 통로를 만들어 주고 씨실을 쳐서 베를 짜는 구실을 한다. 우리말샘

주19

천이나 그물을 짤 때, 세로 방향으로 놓인 실. 우리말샘

주20

씨와 날을 한 올씩 엇바꾸어 짠 천. 우리말샘

주21

중국에서 나는 사(紗)의 하나. 여름 옷감으로 쓴다. 우리말샘

주22

이웃한 날실들이 교차되어 씨실과 엮인 천의 짜임새. 우리말샘

주23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목에 둘러대어 앞에서 여밀 수 있도록 된 부분. 위의 가장자리는 동정으로 싼다. 우리말샘

주24

겉으로 드러난 옷깃. 우리말샘

주25

한복의 상의 부분에서, 여밈 끝이 버선코처럼 뾰족한 모양의 깃.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 유행한 깃의 모양이다. 우리말샘

주26

땅속에 묻혀 있던 물건이 밖으로 나옴. 또는 그것을 파냄. 우리말샘

주27

의식을 치르거나 특별히 예절을 차릴 때에 입는 옷. 우리말샘

주28

의례를 거행할 때에 입는 옷. 우리말샘

주29

영조의 둘째 아들(1735~1762).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영조와의 갈등으로 세자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이후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내린 시호가 ‘사도(思悼)’이며, 정조가 다시 ‘장헌 세자(莊獻世子)’로 시호를 바꾸었다. 우리말샘

주30

조선 시대 사도 세자의 빈(1735~1815). 정조의 어머니로서 남편 사도 세자가 참변을 당한 영조 38년(1762)의 참사를 회고하여 ≪한중록≫을 지었다. 고종 때에 헌경 왕후로 추존되었다. 우리말샘

주31

임금이 입던 정복. 누런빛이나 붉은빛의 비단으로 지었으며, 가슴과 등과 어깨에 용의 무늬를 수놓았다. 우리말샘

주32

겉옷 안에 끼어 입은 옷. 우리말샘

주33

불상을 만들 때, 그 가슴에 넣는 물건. 금ㆍ은ㆍ칠보(七寶)와 같은 보화(寶貨)나 서책(書冊)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이은주(안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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