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儒服)이란 조선시대 때 유생이나 유학자가 입었던 의복의 총칭이다. 유생(儒生)은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주11 자 또는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선비를 말한다. 명나라에서는 1391년(홍무 24) 생원은 옥색 포(布)나 견(絹)으로 만든 난삼(襴衫)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난삼은 소매가 넓고[寬袖] 검은색 주12[皂緣]을 두른 옷이다. 검은색 띠[皂縧]를 두르고 연건수대(軟巾垂帶)를 쓰게 하였다. 1411년(태종 11) 중국 명나라 제도를 따라 성균관 및 5부 유생은 조정의 제도에 의해 비로소 주13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 때의 청금은 난삼(襴衫)을 말하는 것이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 규정된 주2의 관복을 보면 주3에 단령(團領)을 입는데 유학은 청금을 입는다고 하였으며 띠는 주14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오례의」의 생원 방방의(放榜儀)에는 유생들이 “청의(靑衣)와 연두건(軟頭巾)을 착용(着用)한다.”라고 하였다. 주15는 흑단령을 말하는데, 청의에 연두건을 착용한 제도는 1654년(효종 5) 광산김씨 설월당종택의 《보첩보첩(寶帖寶帖)》에 보이는 신진사(新進士)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생들의 관복과 방방복은 변화하였다. 태종대의 청금 유생복은 중종대에 이르러 홍단령으로 변하였고, 영조대에 다시 도포로 변하였다. 방방복 역시 조선 전기 청의 · 연두건에서 영조대에 난삼 · 주16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러한 차림이 모두 유복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유학자들이 입는 복장 역시 유복이라고 칭하였는데 대표적인 복장이 심의(深衣)이다. 심의는 본래 중국에서는 무관자(無官者)의 예복으로 착용하던 옷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착용하였다.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심의에는 복건(幅巾)을 쓰는 것이 기본이지만 복건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관모를 썼다. 정자관(程子冠)은 물론, 방건(方巾), 주4, 주5까지 썼다. 심의에는 소론 · 노론 계통의 수령(垂領)을 주17으로 착용하는 방식과 남인들처럼 ‘ㄴ’자로 꺾어진 주6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 주7와 주18를 갖추었으며 신발은 흑리(黑履) 외에 운혜(雲鞋)도 신었다.
심의 외에 조선 후기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도포(道袍), 주8, 주9 등도 유복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