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저리(營邸吏)이라고도 하였다. 수령의 예하에서 지방행정의 실무를 맡았던 향리들은 그 내부의 계층이 엄격하여, 호장(戶長)·이방(吏房)·형방(刑房) 등 3공형(三公兄)은 상단리(上壇吏)로서 그 밖의 향리와는 크게 구별되었다.
즉, 사령 등 하단리(下壇吏)는 아무리 오래 근속하여도 상단리로 승진할 수 없었으며, 결혼도 동류(同類)의 문중끼리만 하였고, 경저리(京邸吏)나 영저리도 이들 상단리, 주로 호장에서 택차(擇差 : 인재를 골라서 뽑음)되었다.
관찰사의 감영에 파견되어 행정실무, 출신고을과의 연락업무 등을 맡는 외에 수령에 대한 정보를 관찰사에게 제공하기도 하여, 말기에는 이들 영저리에게 잘못 보인 수령은 그 자리를 보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후기에 들어 영저리들은 비리에 의한 경제적 실력자로 부상하였으며 5품계까지 받을 수 있어 비싼 값으로 그 자리가 매매되는 등 폐단이 많았다. 또한, 각 도의 영저리는 각 읍의 향리 가운데 최상급의 상단리였으므로 이들 영저리들이 1도의 향리세계를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여론을 조성, 중앙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품관층, 즉 토성사족(土姓士族)과도 맞서는 유력한 지방세력의 기간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