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본궁 ()

조선시대사
유적
조선시대 함경도 영흥에 있던 태조 관련 본궁.
유적
건립 시기
조선시대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태조(太祖)
소재지
함경도 영흥
내용 요약

영흥본궁은 조선시대 함경도 영흥에 있던 태조 관련 본궁이다. 태조와 태조비 신의왕후 한씨 ·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부모 환조와 환조비 의혜왕후 최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였던 사당이었다. 숙종과 정조 시기에 제향이 정비되어 국가 전례로서 위상을 갖추었다.

정의
조선시대 함경도 영흥에 있던 태조 관련 본궁.
건립 경위

영흥본궁(永興本宮)은 조선 왕실의 본궁(本宮)으로 태조(太祖)와 태조비(太祖妃)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姜氏), 태조의 부모 환조(桓祖)와 환조비(桓祖妃) 의혜왕후 최씨(懿惠王后 崔氏)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제향(祭享)하였던 사당(祠堂)이었다. 본궁은 국왕이 즉위하기 전 주1 시절에 거처하던 곳을 뜻한다.

영흥본궁은 함경도 영흥부 흑석리에 자리하며, 태조의 어진을 모신 준원전(濬源殿)에서 5리 떨어진 순녕사(順寧社)에 있었다. 이곳은 태조의 아버지 환조 이자춘(李子春)의 옛집이었으며, 태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였다. 태조가 즉위 전 이곳에서 별에 제사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영흥본궁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드렸던 원묘(原廟)였다. 같은 성격으로 태조가 즉위 전 살았던 옛집으로 함흥부에는 함흥본궁(咸興本宮)이 있어 태조와 그의 4대조의 위판을 봉안한 곳이 있다.

영흥본궁은 건치의 시기와 연원이 분명하지 않았으며, 제향 역시 국가의 사전(祀典)으로 정비되어 시행되지 않았다. 본궁이라 불리게 된 것은 1666년(현종 7)부터였다. 태조의 본궁임에도 예조나 종부시가 아닌 내수사에서 제향을 관장하였다.

그간 영흥본궁에서의 제향은 무당이 참여하고, 주2가 거행하기도 하였으며, 제향의 운영이나 내용도 국가 제례와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영흥본궁은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흥본궁보다 한 등급 아래로 인식되었다.

변천

영흥본궁의 제향과 위패 봉안은 숙종과 정조 시기에 변화를 맞이하였다. 1695년(숙종 21) 태조비 신덕왕후를 함흥 · 영흥 양 본궁에 추부(追祔)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내노가 담당하여 문제가 되었던 제향을 ‘영흥본궁 별차’를 파견하여 전담하도록 하였다. 정조년간에는 영흥본궁의 제향이 정비되고 환조 내외를 주3하였다.

1791년(정조 15) 정조는 영흥본궁과 함흥본궁에서의 제향 의식을 국가 차원에서 정비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제품(祭品)의 마련과 제기(祭器)의 교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이때의 제향 정비 내용을 『함흥본궁정례(咸興本宮定例)』와 『영흥본궁정례(永興本宮定例)』로 정리하여 1793년(정조 17) 완성하였다.

그리고 1795년(정조 19)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주4, 환조의 8주갑을 맞이하여 환조를 영흥 본궁에 부묘하도록 하였다. 이는 앞서 숙종이 태조의 6주갑을 맞이하여 신덕왕후를 본궁에 부묘했던 것을 따른 것이었다.

정조는 환조와 환조비 의혜왕후를 영흥본궁에 부묘한 후 『 영흥본궁의식(永興本宮儀式)』을 역시 『함흥본궁의식(咸興本宮儀式)』과 함께 완성하였다. 여기에 정비된 영흥본궁의 제향 의식을 보면 1년에 31회의 제사를 지내며, 재관(齋官)은 정부 · 내각(內閣) · 예조의 신하와 그 도의 관찰사가 주5을 하고, 제사의 주6이 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기품(器品)은 대제의 경우 63품으로 정하고, 향악(鄕樂)을 사용하며, 진설도(陳設圖) 6도와 진설표(陳設標) 74표로 영흥본궁의 제향 의식을 제도화하였다.

의의 및 평가

태조가 탄생하였고, 환조의 잠저였던 영흥본궁은 왕업을 일으킨 발판으로 인식되었다. 이제까지 태조와 신의왕후의 위패만 봉안하였던 영흥본궁은 숙종과 정조 시기에 제향이 정비되어 국가 전례로서 위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신덕왕후가 추배되었고, 환조와 환조비가 부묘되어 왕조의 원묘로서 가치와 위상이 크게 격상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숙종실록(肅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조실록(正祖實錄)』
『홍재전서(弘齋全書)』

논문

김우진, 「조선후기 咸興 · 永興本宮 祭享儀式 整備」(『조선시대사학보』 72, 2015)
윤정, 「숙종대 神德王后 本宮 追祔 논의와 本宮 인식의 변화」(『한국사학보』 37, 2007)
윤정, 「정조의 本宮 祭儀 정비와 ‘中興主’ 의식의 강화」(『한국사연구』 136, 2007)
주석
주1

나라를 세우거나 임금의 친족에 들어와 임금이 된 사람의, 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 또는 그 시기에 살던 집.    우리말샘

주2

고려ㆍ조선 시대에, 궁중에 속하여 궁중의 공역(供役)이나 내구(內廏)의 잡역 따위를 맡아보던 노비.    우리말샘

주3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    우리말샘

주4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예순한 살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

임금의 명(命)으로 능이나 묘를 보살피던 일.    우리말샘

주6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임시로 임명하던 제관. 큰 제사에서는 임금이 초헌(初獻)을, 왕세자가 아헌(亞獻)을, 영의정이 종헌(終獻)을 하는데, 일반 제사에서는 문무 당상관이 이를 맡아 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임혜련(충남대 강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