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충혜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林氏)이다.
충정왕의 명으로 중이 되어 원나라의 만덕사(萬德寺)에 있다가 공민왕 초에 소환되어 개경으로 돌아왔다.
1356년(공민왕 5) 전 호군 임중보(林仲甫) 등과 반역을 꾀한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하옥되었다. 그 때 연루된 임중보와 그의 당인 전 정승 손수경(孫守卿), 전 밀직 홍준(洪峻), 감찰대부(監察大夫) 손용(孫勇) 등 10여 인은 처형되었으며, 왕석기도 제주도에 안치되어 호송 도중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겨우 살아남았다.
1363년 서북면도순무사(西北面都巡撫使) 전녹생(田祿生)이, 왕석기라고 칭하는 자가 평양에서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곧 이를 잡아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 효시하였다. 그러나 실은 전녹생이 죽인 자는 왕석기가 아니고, 왕석기와 동행한 중 귀속(歸俗)이었다.
그 때 왕석기는 도망하여 안협(安峽)지방의 민가에서 숨어 살면서 그 집 딸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1375년에 이 사실이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에게 알려지게 되어 그의 아들과 함께 사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