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현종 1)에 거란병(契丹兵)이 내침하자 왕은 나주(羅州)로 피난하게 되었다. 피난 중 공주(公州)에 도착하자 김은부는 교외까지 마중나와 맞이하였으며 옷과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현종(顯宗)이 파산역(巴山驛)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 식사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김은부가 또 밥과 반찬을 마련하여 바쳤다.
그 후 거란병이 물러가자 왕궁으로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었다. 이때 절도사인 김은부는 왕을 영접하고, 그 딸로 하여금 어의를 지어드리게 하고,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왕은 이를 맞아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삼았다. 정종(靖宗)을 낳은 뒤 궁주(宮主)가 되고 얼마 뒤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한편, 왕비의 두 자매도 함께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원평왕후(元平王后), 원혜태후(元惠太后) 등이 그들이다.
세 자매가 함께 한 왕의 왕비가 된 예는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光宗) 때 왕실 족내혼(族內婚)이 이루어진 이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다. 현종과의 사이에 덕종(德宗)·정종의 두 아들과 인평왕후(仁平王后)를 두었다.
1028년(정종 19)에 죽자 시호를 원성왕후(元成王后)라 하고 명릉(明陵)에 장사하였으며 현종 묘실에 합장하였다.
덕종 즉위 후에 왕태후로 추존하였고, 뒤에 용의(容懿)·공혜(恭惠), 1056년(문종 10)에 영목(英穆), 뒤에 양덕(良德)·신절(信節)·순성(順聖), 1140년(인종 18)에 자성(慈聖), 1253년(고종 40)에 광선(廣宣)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