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영(仲英).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원송수(元松壽)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생원 안순(安珣)의 딸이다. 김덕수(金德秀)에게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촉망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의 증조부 김이진(金頤眞)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택해서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에 이어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경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재직중, 전라좌도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인책,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풀려나와 몇몇 관직을 역임하고 고향에 은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 여주의 신륵사에서 적병을 크게 무찔렀으며, 패주하는 적병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다.
그 공으로 경기·강원 방어사 겸 여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강원감사 유영길(柳永吉)의 격문을 보고, 병을 이끌고 가다가 김화에 이르러 적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좌의정에 추증되었고, 김화의 충장사(忠壯祠)·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