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숙행(叔行). 유식(柳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안택(柳安澤)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유관(柳寬)이며, 어머니는 안씨(安氏)이다. 아버지 유관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된 이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훈구 가문(勳舊家門)의 후예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문한관(文翰官)을 역임했고, 이조정랑·의정부사인 등을 거쳐 1423년(세종 5) 판사재감사 겸 지형조사(判司宰監事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이 때 도관정랑(都官正郎) 김유공(金有恭)과 함께 보충군(補充軍) 누락자를 심사하다 일 처리를 잘못해 일시 파면되었다.
다음해 재기용되어,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서 대호군 지함(池含)과 함께 야인 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회유하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되었다. 많은 시련을 견디어내면서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해 조선 측의 제의를 관철시켰고, 이 해 다시 아목하(阿木河)에 같은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우사간에 제수되었으나 공물(貢物)을 수탈한 죄로 일시 파면되었다. 곧 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좌사간에 임용되었으며, 이후 승진을 거듭하였다. 1426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가 곧 소환되어, 이조참의·형조참판 등을 거쳐 1430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대간(臺諫)의 관원과 함께 뇌물을 받고 장리(贓吏)인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태석균(太石鈞)의 고신(告身)에 서명했는데, 이 때문에 의금부의 치죄를 받고 직첩을 박탈당하였다. 2년 뒤 아버지의 간곡한 소청에 의해 다시 서용되었고, 이어서 강원도도관찰사·한성부윤 등을 거쳐 1437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다시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을 때, 강원도관찰사 재직 시의 비행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440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장기간에 걸쳐 외직에 있었다는 점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면서 회피하다 왕의 노여움을 크게 사 의금부에 하옥당하였다.
그 뒤 인수부윤(仁壽府尹)·호조참판·판한성부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43년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고, 2년 후 왕의 행궁(行宮)에 문안가다가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길에서 갑자기 죽었다.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글씨를 잘 써서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안지(安止)·최흥효(崔興孝) 등과 함께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쓰기도 하였다.
또, 대간으로 있을 때에는 불교의 폐해와 개선, 『주자가례』의 보급, 염리(廉吏)의 등용과 장리의 제거를 통한 민폐 제거, 공법 개정(貢法改正) 등을 주장해 당시 사회의 병폐를 많이 개선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상위직으로 진출하면서 일에 성실함이 없었고, 뇌물을 받고 불법을 저질러 자주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안숙(安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