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릉골에 있는 고려 전기 제16대 예종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122년(예종 17)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예종
높이
250㎝
지름
840㎝
소재지
개성특별시 개풍군
내용 요약

유릉(裕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릉골에 있는 고려 전기 제16대 예종의 능이다. 1122년에 조성되었으며, 북한의 보존급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유릉은 3층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만 남아 있고 석수와 석인 등은 사라진 상태이다. 1978년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으나 널방에 부장되었던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었고, 도금 자물쇠와 개원통보 등 일부 유물이 출토되었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릉골에 있는 고려 전기 제16대 예종의 능.
건립경위

예종(睿宗, 1079∼1122, 재위 1105∼1122년) 왕후(王俁)는 숙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이다. 예종은 재위 17년인 1122년 4월 병신일에 사망하여 갑인일에 성의 남쪽에 위치한 유릉(裕陵)에 장례를 지냈다. 원래 능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유릉리에 있었는데, 지명이 바뀌면서 현재는 개성특별시 개풍군 유릉리 릉골에 소재해 있다.

변천

예종의 유릉은 1916년 조사를 통해 3층단으로 되어 있고, 봉토의 지름은 720㎝이며, 12각 주1과 난간석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광복 후 1963년 조사 당시에는 황폐하여 봉토나 병풍석 및 난간석이 거의 다 흙에 묻혀 있었고, 주2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1978년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 구조와 무덤칸을 밝히고 몇몇 유물을 수습한 후, 문밖에 큰 돌 3매를 포개어 영구히 폐쇄하였다. 1990년 보수 정비를 통하여 유릉의 영역은 5‚890㎡ 정도 되고, 현재의 모습처럼 3층단으로 구성하였으며 없어진 병풍석의 면석과 만석을 교체하였다.

형태와 특징

능역은 비교적 협소하지만 3층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봉분의 높이는 250㎝, 지름은 840㎝이다. 지면으로부터 병풍석의 높이는 대체로 80㎝이고, 이마돌의 높이는 30㎝이며, 면석의 높이는 50㎝이다. 병풍석의 외곽으로 난간기둥 몇 개만 노출되어 있고, 그밖에 다른 석물은 없다.

병풍석에서 215㎝ 앞쪽에 높이 70㎝의 잡석을 쌓아 제1단과 제2단을 구별하였다. 제1단 축석에서 340㎝ 떨어져 긴 주3으로 높이 80㎝의 석축을 쌓아 제2단과 제3단을 구별하였다. 제3단 아래는 자연 경사면이고, 축대로부터 1,306㎝ 아래로 주4 터가 있다. 정자각 터에는 주5은 보이지 않고 기와장 파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내부 구조와 발굴 유물

1978년 11월 3일부터 수일 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유릉을 발굴하였다. 무덤칸의 방형은 병풍석의 대각선 방향과 같으며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널방은 평천장으로서 남북의 길이는 305㎝, 동서 너비는 185㎝, 높이는 190㎝이다. 천장은 두께 65㎝의 돌 3매로 덮었으며, 그 위에 회칠하고 그 부분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던 흔적이 있다. 벽은 막돌로 쌓아 올리고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회칠하였지만 다 떨어져 나갔다.

널방 바닥에는 33x32㎝ 크기의 주6을 깔았다. 주7 주위로 길게 한 줄로 깔고 나머지 부분에는 반 장짜리의 전돌을 깔았다. 널방의 중심에는 남북으로 180㎝, 동서의 너비는 80㎝의 관대를 놓았다. 관대석은 두께 25㎝의 돌 3장을 맞물려서 만들었다. 널방 바닥에 깐 좌우로 올라온 높이는 15㎝, 나머지는 10㎝이다.

유릉은 발굴 당시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남쪽으로 난 널문은 모두 썩어 없어졌는데, 널문에 달았던 문 장식품과 길이 26㎝, 너비 8㎝의 도금한 청동 자물쇠가 출토되었다. 그밖에 도굴되고 남은 길이 11㎝, 너비 1.5㎝ 크기의 청동제 손칼과 주8를 비롯한 화폐 몇 닢도 출토되었다.

의의 및 평가

고려 전기 왕릉으로서 능주가 밝혀져 있고, 1978년 북한 고고학연구소의 발굴을 통해 능 내부를 밝히고, 1990년 보수 정비되었다. 북한의 보존급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 한국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평화문제연구소, 2005)
김인철, 『고려무덤 발굴보고』(백산자료원, 2003)

논문

박형열, 「고려왕릉의 특징과 변천」(『고고학』 제20권 제1호, 중부고고학회, 2021)
권두규, 「고려 왕릉의 봉분 형태」(『한국중세고고학』 5, 중세고고학회, 2019)
김일권, 「고구려의 천문 문화와 그 역사적 계승: 고려시대의 능묘천문도와 벽화무덤을 중심으로」(『고구려연구』 22, 고구려연구회, 2006)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2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3

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    우리말샘

주4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5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우리말샘

주6

예전에 왕궁, 사찰, 왕릉 따위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데 쓰던 벽돌.    우리말샘

주7

예전에, 무덤 안에 관을 얹어 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 횡혈식 석실 따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8

중국 당나라 때에 통용되던 엽전의 하나. 고조 4년(621)에 만든 청동 화폐로, 가운데 네모난 구멍의 상하ㆍ좌우에 ‘開元通寶’의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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