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회경(晦卿), 호는 공북정(拱北亭). 아버지는 유희(柳禧)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도량이 뛰어났으며, 8, 9세에 처음으로 글을 배워 대의(大義)를 통달하였고,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과에 응시할 때 시험관이 유세장의 몸집이 크고 건장함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여 “쌀 361석을 몇 대의 수레에 얼마씩을 실으면 고루 실을 수 있는가?” 하고 묻자, 유세장은 곧 수레 19대에 각각 19석을 실으면 된다고 하였다.
그 때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계산이 빠른 이유를 묻자, 유세장은 바둑판의 이치를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하였고, 이에 여러 시험관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그 뒤부터 매사에 조심하여 언어동작이 고인(古人)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고, 또 한번도 권귀(權貴)의 집을 찾아간 적이 없고 오직 밤을 새워 조용히 병서를 공부하였다.
1689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궁외로 내쳐 음식공급조차 끊는다는 소문을 듣고, 밤이면 흐느껴 울고 낮이면 저자에 나가 쌀을 사서 손수 다시 정백미(精白米)로 찧어, 석되만 깨끗한 보자기에 싸서 그 위에 단지 신근봉(臣謹封)이라고만 써서 매일 담너머로 가만히 던졌다.
그 뒤 7년이 지나 왕비가 다시 환궁하던 날, 그 쌀을 보낸 사람을 찾았으나 왕비를 뫼시는 대열 중에 있으면서도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알리지 아니하였으나 저자의 쌀장수 김태석(金太碩)이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고 한다. 벼슬은 현감이었으나 죽은 뒤 좌승지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