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희여(希輿), 호는 우헌(愚軒)·서강(西岡). 경상도 삼가(三嘉)의 창동(滄洞)에서 출생. 아버지는 유화식(柳華植). 어머니는 선산김씨(善山金氏) 김치한(金致漢)의 딸이다. 최익현(崔益鉉)·정재규(鄭載奎)의 문인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자, 스승인 정재규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 5적(賊)을 성토하려고 공주(公州)까지 갔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정산(定山)으로 가서 최익현과 함께 전국의 선비들에게 노성(魯城)에서 거의(擧義)할 것을 포고하고, 그 일이 실패하여 통곡하면서 돌아왔다.
1910년에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1919년에 아들인 유근수(柳瑾秀)를 서울에 보내어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케 하였다. 근수가 돌아와서는 부근의 인사들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자, 그에 연루되어 합천 경찰서에 구속되자, 저들이 주는 음식을 일체 입에 넣지 않은 채 항거하였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중용(中庸)』 수장(首章)의 천(天)의 뜻을 지정지신(至精至神)한 기(氣)로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理)가 겸한 것으로 보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근사록(近思錄)』을 깊이 연구하여 그 강록(講錄)을 남겼으며,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사우(師友)와 함께 문답하면서 그 요점을 뽑아 엮어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에 『서강문집(西岡文集)』 2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