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양 ()

남해문견록
남해문견록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예조참의, 의주부윤,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계방(季方), 자장(子章)
후송(後松)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18년(숙종 44)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성천부사|대사간|예조참의|의주부윤|공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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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참의, 의주부윤,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방(季方)·자장(子章), 호는 후송(後松). 유성(柳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유태명(柳泰明)이다. 아버지는 유무(柳懋)이며, 어머니는 한중희(韓重熙)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6년(영조 32) 생원이 되어 현감을 지냈으며, 176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65년 정언(正言)을 거쳐 사서(司書)·수찬·교리(校理)를 역임했고, 1775년 집의(執義)로서 백관들의 안일함을 탄핵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나라 군대를 위해 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영남어사로 파견되어 지방관들의 치적을 점검하였다. 1776년 왕세손이 주도한 응제(應製)에 1등으로 뽑혀 문명을 날렸다. 이어 장헌세자에게 시호를 올릴 때 공로가 인정되어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라 1777년(정조 1)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다.

이 때 영서 지방의 화삼전(火蔘田) 수세·속전세(續田稅)·강릉부 공삼(貢蔘) 감세·강릉부 봄보리 작전(作錢) 등의 민폐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또, 진전(陳田)의 면세 문제, 표류해온 왜인의 문제 등도 강릉 지방의 큰 폐단으로 지적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승지를 지내고, 1779년 성천부사를 거쳐 다시 대사간을 지냈다.

1781년 예조참의로서 예조이정당상(禮曹釐正堂上)이 되어 예조정랑 이가환(李家煥)과 함께 『춘관지(春官志)』와 1750년 이후의 『영희전지(永禧殿誌)』를 편찬하였다. 1783년 예조참판으로 감동관(監董官)이 되어 덕릉(德陵)·정릉(定陵)을 개축했고, 동지사 겸 사은부사(冬至使兼謝恩副使)를 역임하고 이어 승지가 되어 『동국문헌비고』의 수정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이승훈(李承薰)이 연경에서 금서(禁書)인 천주교 관련 서적을 몰래 들어온 것을 금지하지 못한 죄로 후일 규탄을 받았다. 178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참판으로『춘방지(春坊志)』를 저술하였다.

1787년 부총관이 되어 『국조오례의』를 보충해 편찬했고, 이듬해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저술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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