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기(尹箕), 자는 백열(伯說), 호는 간보(艮輔). 윤사심(尹思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정(尹霆)이다.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윤강원(尹剛元)이며, 어머니는 이시영(李時榮)의 딸이다.
아버지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대윤파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자, 함께 따라가서 20여년 동안 모시고 시중을 들었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유생의 소두(疏頭)가 되어 을사사화 때 책록된 공신호(功臣號)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직언으로 명성을 떨쳤다.
1576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공조좌랑·사헌부감찰을 거쳐, 여러 군현을 다스려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원부사로서 무관을 대신하여 성천에 가서 세자를 시종하였다. 1602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가례 때 성용도감제조(成用都監提調)로 공이 인정되어 첨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은 더욱 총애를 받으려고 대비에게 휘호를 올릴 것을 의논하고, 백관을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반대하는 자는 처벌한다고 위협하여 모두 따랐으나, “신하된 자 임금을 섬김에 어찌 의심받거나 아첨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홀로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