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방서(邦瑞), 호는 일암(逸庵). 윤기(尹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천구(尹天衢)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윤반(尹攀)이며, 어머니는 이정기(李廷夔)의 딸이다.
1679년(숙종 5)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기거주(起居注)와 정언·지평·교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701년 대사간으로서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관련된 장희재(張希載)의 죄를 다스렸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의 피해와 세자(뒤의 경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대신들을 극형에 처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에 승진해 오랫동안 미결로 있던 소송 사건을 신속히 처리해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어서 한성부판윤·우참찬·예조판서·공조판서 겸 종부시제조·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16년 사건 처리에 공평하지 않다는 탄핵을 받고 한 때 파직되었으나, 뒤에 좌참찬이 되어 다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 때 과옥사건(科獄事件)이 일어나 이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꺼려 회피할 때, 공평하고 정확하게 조사해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금부에서 수사한 일을 잘못 처리했다 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강직하여, 직간할 때 왕의 뜻에 거슬려 엄한 교지를 받아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한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영특하고 총명했으며 경서와 문장에 능하였다. 특히, 국조전례(國朝典禮)에 밝았고, 문장은 조리가 있었으며, 시도 간아(簡雅)하였다.
해서·초서·전서·예서에 재주가 있어 한 때 사대부들 사이에 윤덕준의 금석지각(金石之刻)이 유행했다 한다. 말년에 서사(書史)로서 여생을 보냈다. 뒤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요청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