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승(德升), 호는 팔무당(八無堂). 윤해거(尹海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부(尹扶)이다. 아버지는 윤언교(尹彦敎)이며, 뒤에 윤현교(尹顯敎)에게 입양되었다.
1735년(영조 11)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4년(영조 30)에 전 현감으로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대사간 · 도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전결(田結)을 잘못 보고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762년 충청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이산(離散)하므로, 호서안집사(湖西安集使)가 되어 흩어진 농민들을 안집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뒤 대사헌 · 이조참판 ·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771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공조판서 · 평안도관찰사 · 우참찬을 거쳐 1790년(정조 14) 판의금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였다. 서예에 능하여 80세가 넘어서도 궁중의 서사(書寫)를 맡아 정조로부터 필력(筆力)이 유건(愈健)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달천사비(達川祠碑)」 · 「적전사기적비(赤田社紀蹟碑)」 · 「적지기적비(蹟池紀蹟碑)」 · 「임경업충렬사비(林慶業忠烈祠碑)」 등 당시의 금석문은 윤동섬의 손으로 쓰인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