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평(景平), 호는 임재(臨齋). 참판 윤비경(尹飛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장(直長) 윤명원(尹明遠)이다. 아버지는 부사 윤봉소(尹鳳韶)이며, 어머니는 이징하(李徵夏)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정시 문과에 장원해 전적이 되었다. 이듬 해 정언에 재직 중,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이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왕세제(뒤에 영조)를 죽이려다 발각되자 이들 하수인들을 죽여 증거를 인멸시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재신(宰臣) 수십 인과 함께 사실을 밝힐 것을 상소했으나 소론 과격파의 방해로 묵살되었다.
신임옥사로 노론이 추방당할 때 삭직되어 병계(屛溪)에 은퇴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의 집권으로 정언·교리·이조좌랑·헌납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소론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의 남은 죄를 추궁하다가, 1728년 정미환국으로 작은아버지 윤봉조(尹鳳朝)가 귀양가고 노론의 영수인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 등 수십 인이 파직당할 때 같이 파직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려 노론의 4대신 중에 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은 복관(復官)하도록 조치하자, 신설(伸雪)이 고르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펴지지 못했음을 주장하고 시골로 가서 종신토록 절조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후 영조는 탕평(蕩平)을 실현해 보고자 삼사(三司)을 비롯한 승지·보성군수·양양부사·대사간 등 여러 벼슬을 수십 차례 내려 회유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부제학을 제수해도 상소로서 전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영조는 윤심형이 당을 고수하는 마음이 굳셈을 알고 파하고 말았다.
말년에 가서 당시 선비들이 지기(志氣)가 쇠퇴하고 이권과 벼슬자리를 좇는 풍조가 만연하자, 영조는 지조를 지킨 윤심형의 일생을 기리기 위한 예우로 1752년(영조 28)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이듬해 예조참판에 봉하였다. 다음 해에 죽으니, 장단(長湍)에 장례할 때 윤심형이 남긴 뜻에 따라 조복(朝服)을 쓰지 않고 염습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가 한 점 전하며, 이 그림은 원말의 대표적 화가인 왕몽(王夢)의 화풍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저서로는 『임재집(臨齋集)』이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