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창주(滄洲). 윤계겸(尹繼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임(尹琳)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윤안인(尹安仁)이며, 어머니는 정여관(鄭汝寬)의 딸이다.
1534년(중종 29) 생원이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다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대윤일파의 제거에 앞장섰고, 다음해에는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尹元老) 제거에 크게 노력하였다.
이를 계기로 윤원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이후 급속히 출세하게 되었는데, 이조정랑·장령·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2년 뒤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윤원형의 서얼허통론(庶孼許通論)을 공박하지 못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1558년 동지 겸 주청사(冬至兼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서 이조판서가 되었다. 1565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윤원형이 제거되자 파직당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성격이 경박하고 자부심이 강하여 일찍부터 대학자로 자처하는 등 공명심은 많았으나, 주색을 즐기지 않고 비교적 청렴·결백하였다고 하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