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차야(次野), 호는 백사(白沙). 증찬성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尹忭)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형인 영의정 윤방(尹昉)을 비롯한 네 형제가 모두 높은 관직에 진출하였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9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관이 되었다. 1599년 호조좌랑을 거쳐 1605년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대북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는 죄명으로 압송되는 김직재(金直哉)를 후대하였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복관되어 16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5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한 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를 겸직하여 적과 싸웠다.
그러나 안주를 빼앗긴 뒤 평양에서 싸우고자 하였지만 병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종사관(從事官) 홍명구(洪命耉)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성천으로 후퇴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해병사 정호서(丁好恕)도 싸우지 않고 황주를 포기하는 등,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형 윤방을 비롯하여, 조카 윤신지(尹新之)의 아내이며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貞惠翁主)가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