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남천할 때, 상호군으로서 왕을 수종한 공으로 신축호종1등공신(辛丑扈從一等功臣)이 되었다.
또한 1363년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일으키자 왕을 업고 피신한 공으로 부시피난1등공신(扶侍避難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이에 왕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재상들의 탄핵을 받아 1371년 하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374년 최만생(崔萬生)·홍륜(洪倫) 등이 왕을 시해하였을 때 먼저 침전에 들어가 이 사실을 알고는 왕이 편하지 못하다고 속이고 백관의 출입을 금하였다.
새벽에 태후(太后)가 이르자 상의하여 외부에 상(喪)을 알리지 않고, 시위(侍衛)를 예전과 같이 하면서 왕명으로 재상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안사기(安師琦) 등을 불러 밀의하고 최만생·홍륜 등을 체포하여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