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평서(平瑞). 공주 출신. 이형직(李亨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수번(李秀蕃)이다. 아버지는 이사질(李思質)이며, 어머니는 권응(權譍)의 딸이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 후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에 올랐으나, 성질이 불손하여 사소한 일로 승정원 서리를 매로 다스린다고 하여 처음에는 문비(問備: 죄가 있는 관원을 조사, 신문하던 일)를 명하였다가 마침내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1765년(영조 41)에 정언이 되었다. 1767년(영조 43)에 간관을 사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가 다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어 두 달 뒤 특별히 방면되었다. 1775년(영조 51)에는 장령이 되어 군정·과거·사채의 폐단을 상소하여, 부호들의 토지겸병을 제한하여 30경을 넘지못하도록 했고, 과거의 횟수와 인원을 줄이도록 했으며, 사채가 고리대금화하는 현상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1779년(정조 3)에 대사간이 되었다. 그 해 말에 곡산부사(谷山府使)가 되었는데, 홍국영(洪國榮)에게 관직을 제수하기를 청하였다. 이듬해에 향교를 세운다고 돈을 횡령하였다는 죄목으로 구례현(求禮縣)에 귀양을 갔다가 2년 후 풀려났다.
그 뒤 경기도 양근군에 은거할 때에 촌사(村舍)를 사들이고 허가없이 소나무와 소를 훔쳤다는 이유로 다시 덕원부에 정배되었다. 1787년(정조 11)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곡산부사 때에 홍국영상소, 향례전을 사사로이 쓴 일, 양근에서의 일을 이유로 사직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