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우참찬,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위(景祁)
시호
공장(恭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31년(세종 13)
사망 연도
1494년(성종 25)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전라도관찰사|우참찬|병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에, 우참찬,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위(景祁).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종묘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좌랑에 이를 때가지 항상 서연(書筵)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 1463년 성균관직강 겸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부호군(定略將軍副護軍)에 임명된 뒤 곧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 해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 경비의 식례(式例)인 『식례횡간(式例橫看)』을 찬정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았고, 같은 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1477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지냈다. 1479년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가 되고, 이듬 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에는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넓혀 위판제도(位版制度)를 일신하였다.

또, 향관(享官: 祭官)의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관원이 時政에 대해 적어 보관하던 곳)의 북쪽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고치는 등 학궁(學宮)에 공이 컸다.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이범직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