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군범(君範). 호는 목곡(牧谷). 이식(李植)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신하(李紳夏)이다. 아버지는 양구현감 이당(李簹)이며, 어머니는 박원개(朴元開)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삼척부사 이번(李蕃)에게 입양되었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1717년(숙종 43)에 진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홍문관에서 재직하였다. 1721년(경종 1) 헌납으로 있을 때,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연잉군(延仍君: 뒤의 영조)에 대해 나쁜 말을 퍼뜨린 유봉휘(柳鳳輝)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신임옥사 때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곧 등용되어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에 대한 논죄를 철저히 하여, 그 시비를 명백히 밝힐 것을 극언해 한때 영조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 1) 승지를 지내고, 이조참의를 거쳤다. 1727년에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강화부 유수가 되었다.
그러나 왕세자의 관례 때 봉전문(封箋文)을 빠뜨린 사건으로 파면당했다. 그 뒤 향리에서 머물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 등 소론 일파가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소현세자의 嫡孫)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급히 상경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 반란이 평정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있다가 1729년 다시금 직책을 맡았다.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언관으로서 최고직인 대사간을 지냈으며, 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1년에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지냈다. 1744년 홍주목사를 거쳐 이듬 해 경기도관찰사·판의금부사를 지냈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749년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1년 광주부유수로 「한봉도(汗峰圖)」를 지어 올렸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목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