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진 ()

이기진 초상
이기진 초상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홍주목사, 평안도관찰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군범(君範)
목곡(牧谷)
시호
문헌(文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7년(숙종 13)
사망 연도
1755년(영조 31)
본관
덕수(德水: 지금의 경기도 개풍)
주요 관직
판의금부사|이조판서|홍주목사|평안도관찰사|판돈녕부사
정의
조선 후기에, 홍주목사, 평안도관찰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군범(君範). 호는 목곡(牧谷). 이식(李植)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신하(李紳夏)이다. 아버지는 양구현감 이당(李簹)이며, 어머니는 박원개(朴元開)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삼척부사 이번(李蕃)에게 입양되었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7년(숙종 43)에 진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홍문관에서 재직하였다. 1721년(경종 1) 헌납으로 있을 때,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연잉군(延仍君: 뒤의 영조)에 대해 나쁜 말을 퍼뜨린 유봉휘(柳鳳輝)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신임옥사 때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곧 등용되어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에 대한 논죄를 철저히 하여, 그 시비를 명백히 밝힐 것을 극언해 한때 영조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 1) 승지를 지내고, 이조참의를 거쳤다. 1727년에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강화부 유수가 되었다.

그러나 왕세자의 관례 때 봉전문(封箋文)을 빠뜨린 사건으로 파면당했다. 그 뒤 향리에서 머물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 등 소론 일파가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소현세자의 嫡孫)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급히 상경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 반란이 평정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있다가 1729년 다시금 직책을 맡았다.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언관으로서 최고직인 대사간을 지냈으며, 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1년에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지냈다. 1744년 홍주목사를 거쳐 이듬 해 경기도관찰사·판의금부사를 지냈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749년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1년 광주부유수로 「한봉도(汗峰圖)」를 지어 올렸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목곡집』이 있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훈호집(熏湖集)』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신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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