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성천부사, 함경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초(有初)
쌍호당(雙壺堂)
시호
충민(忠愍)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25년(인조 3)
사망 연도
1688년(숙종 14)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정언|사간|동부승지|양주목사|경상도관찰사|동지부사|성천부사|함경도관찰사|형조참판|나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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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성천부사, 함경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초(有初), 호는 쌍호당(雙壺堂). 종실 경명군 이침(景明君 李忱)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이제형(李齊衡)이며, 어머니는 남두명(南斗明)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50년(효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문음으로 입사해 통덕랑에 이르렀다가, 1660년(현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곧 승문원에 배속되었다. 1662년 정언(正言)이 되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곳 정세에 대한 상세한 문견록을 작성해 올려 포상되었다. 이어 정언·지평을 번갈아 지내다가 1667년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한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시 사직하였다.

2년 후 정언으로 다시 기용되었고, 사간·집의 등을 거쳐 1673년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육조의 참의를 번갈아 역임하다가 숙종 초에 양주목사·장단부사·광주부윤(廣州府尹) 등을 지냈다. 1678년(숙종 4)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오리(汚吏: 청렴하지 못한 관리)를 숙청해 수령들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2년 후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귀국 후 곧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가 문무를 겸비했다 하여 북병사로 교체되었다. 이 때 숙의방(淑儀房)에 진상을 지나치게 하고 진상 문서에 신(臣)을 칭한 일을 계기로, 사헌부에서 전라도관찰사 때의 비행 및 형제를 보살피지 않은 점까지 들추어 계속 탄핵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그 뒤 충청·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평소 준엄한 언사(言辭)로 남의 미움을 많이 받아 나주목사로 좌천하게 되었다. 이 일은 왕의 적극적인 비호로 무마되었으나 본인은 이 때문에 병을 얻어 죽었다.

평소 치산(治産)에 힘쓰지 않아 가족이 궁핍했을 정도로 당시 청백리로 이름났었다. 이조판서·대제학 등에 추증되었다. 영광의 장천사우(長川祠宇)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매산집(梅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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