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풍(咸豐). 자는 경이(敬而), 호는 칠실(漆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은(李訔)이다. 학자이며 의병장인 강항(姜沆)과 교유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을 닦았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피난민을 모집하여 의병을 조직하였으며, 산에 거점을 두고 싸워 전과를 많이 올리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이덕일을 불러 일을 함께 논의한 바가 많았다. 이순신이 죽자 성을 쌓아 적을 제압할 방책을 논하여 이정구(李廷龜)의 천거로 절충장군에 올랐다.
뒤에 통제영의 우후(虞侯)가 되었는데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사관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의금부의 탄핵으로 삭직당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우국가(憂國歌)」 28수를 지어 당시 국정에 대하여 충분(忠憤)한 심정을 읊었다. 이 「우국가」가 학자에 따라 「당쟁상심가(黨爭傷心歌)」 또는 「당쟁비가(黨爭悲歌)」라고도 불리며, 국가의 안위를 비분강개하여 읊고 있어 우국만을 주제로 한 시조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수의 것이 된다.
당대의 세력가 유희분(柳希奮)의 매부였으나 중앙정국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함평의 월산사(月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칠실유고』 2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