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돈영(李敦榮). 자는 윤약(允若) 또는 윤공(允恭), 호는 신게(莘憩).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득영(李得英)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상두(李相斗)이며, 어머니는 서인수(徐寅修)의 딸이다. 이상형(李相衡)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 증광 별시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다. 1831년 도청(都廳), 1836년 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었다. 그 뒤 1840년(헌종 6)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843년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판에 다시 등용되고 1845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대사헌(大司憲)·한성부판윤 등을 차례로 지냈으며, 1849년(철종 즉위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853년 공조판서·판의금부사, 1855년 예조판서·병조판서, 이듬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57년 다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58년 이조판서, 1860년 형조판서·공조판서, 이듬해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1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각지에서 발생하는 민란 수습에 전력하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듬해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3년(고종 즉위년)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제조로 애책문제술관(哀冊文製述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1864년 좌참찬·판의금부사·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실록찬수당상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865년, 1866년 제조·호조판서를 지낸 뒤, 1874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듬해 좌찬성으로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의 임무를 수행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어 1882년 대제학이 되어 회권(會圈)에 참여하였다.
비록 일생을 관직에서 보냈지만, 청백한 것을 좋아해 연꽃을 사랑한다는 「연설보(蓮說補)」를 지어 자신의 뜻을 펼쳤다. 저서로는 『갑고(甲藁)』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