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국미(國美), 호는 삼복재(三復齋). 이덕여(李德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민달(李敏達)이다. 아버지는 목사 이세무(李世茂)이며, 어머니는 군수 김우(金楀)의 딸이다.
1693년(숙종 19) 사마시에 합격, 같은 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697년 성균박사가 되었고, 4년 뒤에 사간원정언에 승진하였다. 이 때 과거시장(科擧試場)의 문란과 대간선발의 공정을 강조하는 소를 올렸다.
이어서 지평·정언을 번갈아 역임하였는데, 이 시기 국정전반에 걸친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소를 올리자, 왕이 말이 바르고 의로우며 엄정하다고 하여 이를 가납(嘉納: 흔쾌히 받아들임)하였다.
그 뒤 지평(持平)·정언(正言)·문학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 재상(災傷)의 피해구제책 및 파주목의 봉상시(奉常寺) 시장(柴場) 폐해의 시정책 등이 채택되었다. 1702년 북평사로 외직에 나갔는데, 다음해에 귀환하여 함경도의 행정구역관할, 청나라의 사상활동(私商活動), 말·군사 동원 등과 같은 이 지역의 중요문제에 대한 개혁책을 상소하였다.
이동언은 대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남의 미움도 많이 받게 되어, 결국 1708년 조태억(趙泰億)의 모함으로 인하여 투옥되었다. 추고관(推考官)인 동지의금부사 한성우(韓聖佑)의 변호도 있었지만 석방되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다음해에 이재(李縡)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