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사추(士秋), 호는 귀락당(歸樂堂)·행호거사(杏湖居士). 이길(李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유겸(李有謙)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숙(李䎘)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오백령(吳百齡)의 딸이다. 중부(仲父)인 지평(持平) 이흡(李翖)에게 입양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96년(숙종 22) 진사로 정시 문과에 장원해 전적(典籍)·좌랑을 거쳤다. 지평 겸 지제교로 있을 때,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대제학 오도일(吳道一)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면서 오도일의 아들 오수원(吳遂元)을 합격시킨 데 대해 반박하는 소를 올려, 마침내 오수원을 파방(罷榜: 과거 급제를 무효로 함)시켰다.
이어 교리·응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706년 대사헌 겸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를 지냈다. 1709년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어,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저술한 『예기유편(禮記類編)』에 주자(朱子)의 글귀를 고친 것을 논죄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삭직되었다.
이듬해 숙종이 후회하고 『예기유편』을 모두 불살라버린 다음 복관(復官)시켜 이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716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경종이 즉위하면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형(銓衡)을 엄정히 하고 행신(倖臣)의 폐를 막아 침체한 정사를 진흥시켰다.
노론으로서 1721년(경종 1)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노론 대신들과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세제(世弟) 책봉을 주청해 실현시켰다. 그러나 소론이 일으킨 신임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도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불려와서 국문을 받다가 64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복관되었다. 영암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귀락당집(歸樂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