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의(聖意), 호는 금어(琴漁)이다.
1853년(철종 4)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8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동학교수(東學敎授)·부교리·병조정랑·영돈녕·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근심과 울분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였다. 당시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순국한 이들로는 민영환, 조병세, 이상철, 송병선 등이 있다.
경전을 근본으로 삼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독하였으며,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을 베풀어 위로 군주를 보필하고, 조정에는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국민에게 최대한의 복리를 증진시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주장하였다.
노년에는 금호(琴湖) 가에 살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국문으로 저작된 「금호어인가(琴湖漁人歌)」와 「단경삼첩(短脛三疊)」 등은 고전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저서로는 『금어유고(琴漁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