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 ()

금어유고
금어유고
유교
인물
개항기 이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성의(聖意)
금어(琴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38년(헌종 4)
사망 연도
1905년(고종 42)
본관
연안(延安)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이조참의|예조참판|대사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개항기 이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의(聖意), 호는 금어(琴漁)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3년(철종 4)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8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동학교수(東學敎授)·부교리·병조정랑·영돈녕·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근심과 울분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였다. 당시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순국한 이들로는 민영환, 조병세, 이상철, 송병선 등이 있다.

경전을 근본으로 삼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독하였으며,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을 베풀어 위로 군주를 보필하고, 조정에는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국민에게 최대한의 복리를 증진시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주장하였다.

노년에는 금호(琴湖) 가에 살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국문으로 저작된 「금호어인가(琴湖漁人歌)」와 「단경삼첩(短脛三疊)」 등은 고전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저서로는 『금어유고(琴漁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금어유고(琴漁遺稿)』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