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원익은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른 후 1573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575년 이후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왕의 피난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적군과 싸웠으며, 1593년 평양탈환 때 공을 세우고 변무사(辨誣使)로 명에 다녀오는 등 큰 활약을 하여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청백리에 피선되었으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원익의 영정은 현재 3본이 전하는데, 그 중 이 영정이 가장 이른 시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우안7분면에 단학흉배(單鶴胸背)가 부착된 아청색 단령(團領 : 깃이 둥근 공복)을 입고 호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앉은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오른손은 부채를 쥐고 왼손은 관대를 잡고 있는 특이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러한 도상의 특징으로 볼 때 이 초상은 이원익이 1573년 성절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올 때 그린 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음영처리나 손을 드러낸 자세, 호피를 깐 의자 같은 것들은 그 당시 조선 중기의 초상화 양식이나 화법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이 상은 안면처리에 있어서 음영 표현이 시도되어 있으며, 수염 · 눈썹 · 뺨 등도 담묵으로 처리한 뒤 검은 먹선으로 다시 처리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눈은 이금(泥金 : 아교풀에 갠 금박가루)으로 채색한 듯 눈동자 주위에 이금색이 보이며, 손의 표현은 이현보초상(보물, 1986년 지정)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기법은 다소 미숙한 편이다.
만약 이 영정이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것이라면 숙종 이후의 이모본(移模本)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 경우에도 원본의 제작시기는 이원익이 당하관(堂下官)으로 재직하던 때이어야 하므로 사간에 오르기 전 헌납으로 있었던 1580년 이전의 어느 시기가 된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나라 초상화의 전형적인 도상이나 화법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그 원본은 중국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고 생각된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조선 중기 공신도상(功臣圖像)의 특징을 적지 않게 보여주는 중기 제작의 원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호성공신상으로 보기는 힘들 듯하다.
전체적으로 호성공신상의 특징인 좌안7분면의 전신교의좌상과 부합되는 면이 없지 않지만, 바닥에 채전(彩氈) 대신 돗자리가 깔려 있고, 단령의 트임 사이에 강한 사선으로 묘사된 내공(內供 : 옷 안에 받치는 감) · 첩리(帖裏 : 무관의 공복) · 고(袴)의 전형적인 도상 대신, 내공과 첩리만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다소 뒷 시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