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립(李裕岦)은 1907년 평안북도 삭주 출생으로, 독립운동가 이관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채영(采英) · 중정(中正)이고 호는 한암당(寒闇堂)이다. 유년 시절 부친이 설립한 구성재(求誠齋)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오동진(吳東振)이 이관집과 계연수(桂延壽)가 광개토대왕릉비를 함께 답사할 때 자금을 댔고, 독립운동가 오봉록(吳鳳碌)과 이유립의 집안이 자주 교유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료적 근거는 부족하다. 또한, 1919년 단학회(檀學會)에서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계연수 · 최시흥(崔時興) · 오동진 등의 강의를 들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단학회와 배달의숙의 실체는 근거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 1924년 삭주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해 1927년 21세에 6년제를 졸업하였다.
1930년 11월 15일 삭주군에 김석순(金碩淳) · 명재수(明在守)와 함께 ‘지덕체(智德體) 3육(育)을 본지로 하여 청년의 인격을 높이고 실력을 양성하며 그 향상 진보를 기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삼육사(三育社)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매주 일요일은 독서일, 월요일은 저금일, 토요일은 반성일로 정해서 활동하고,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지방 청년 문사의 명문옥고를 모아서 잡지를 발행하였지만, 적은 부수를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삭주군 구곡면의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유교의 기본 소양을 바탕으로 중등학교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함께 학습하고 제공하는 단체로 보이며, 여기에서 청년 계몽운동가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5월 삼육사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와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상황에 처하자 『동아일보』에 성금을 모금하였고, 같은 해 12월 19일에도 만주 동포 위문금 성금 모금 활동에 동참하였다.
1931년 1월 잡지 『신민』 64호에서 변호사 이인(李仁)이 공자와 유림, 종래의 관습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여 전국 유림의 반발을 샀는데, 유림총본부에서 도마다 두 사람씩 모두 22명을 '모욕자성토실행위원'을 선정하였다. 이때 실행위원 중 1명으로 선정되었다. 이에 유림총본부 실행위원과 삭주군 개인으로서 두 차례의 성토문을 보냈다.
1932년 제2회 동아일보사 주관 브나로드 운동대원으로 참가 신청을 하였고, 같은 해 9월 25일 안순환(安淳煥)이 설립한 조선유교회에 참여하였다. 1933년 4월 5일 개강한 산하 교육기관인 명교학원에 지원하여 9월 29일 우등생으로 수료하였다. 이후 삭주로 돌아가 조선유교회의 삭주 지역 전교사(傳敎師)로 활동하면서 유교를 전파하고 입교인을 늘리는 역할을 맡았다. 1933년 11월 30일 삭주전교실을 설치하고 예식을 지키는 데에도 힘써 1934년 명교학원 시절 스승 송기식(宋基植)과 유교 예배식에 관하여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6월 23일 삭주지교부를 설립하였다.
1935년에 삭주유교소년회와 삭주유교청년회를 설립하는 데 앞장서 유교의 확대와 공자 대동주의의 철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5년에 조선유교회의 기관지였던 『일월시보(日月時報)』의 2대 주필로 활동 중 조선유교회의 방향을 둘러싸고 내부 대립 끝에 같은 해 6월 10일 귀향하였다. 1938년 1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동아일보사 삭주지국장을 맡았고, 이후 교육 활동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이뤄진 삭주군 구곡면 소학교설립기성운동은 이유립의 아버지 이관집이 운영한 구성재 서당의 자산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1939년 이상유(李尙游)의 희사금으로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였다.
전시 체제기 조선유교회에 참여한 일제에 협력 성향이 강한 이유립 유림들은 경학원에 참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황도유학’과 연결되어 1939년 결성된 조선유교연합회에 참여하여 일제에 협력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945년 4월 건국동맹(建國同盟)의 삭주 지역 책임자를 맡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건국동맹의 삭주 지역 조직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51년 왕정 복고를 목표로 ‘정치혁명민족협의회’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일본에 있던 영친왕 이은(李垠)을 국가 수령으로 만들고자 기도하였지만, 이듬해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1961년 대종교에 들어가 대전 시교당 전무로 근무하다가 1963년 대종교인들과 함께 단단학회(檀檀學會)를 조직하여 1965년 단단학회의 기관지인 『커발한』을 발행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회장에게 단군을 신화적 존재로만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장문의 서한을 보냈다는 견해가 있고, 대종교를 ‘커발한’이라고 명기하고 대종교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66년 2월 26일 단군숭봉민족통일협의회(檀君崇奉民族統一協議會)의 이름으로 박성오(朴性五)와 함께 단군상 건립 진정 인사차 조선일보사를 내방하였으며, 같은 해 8월 28일에도 단군숭봉민족통일협의회장 명의로 발족 인사차 조선일보사를 다시 한번 내방하기도 하였다.
1971년 펴낸 『환단휘기(桓檀彙記)』에서는 커발한은 ‘태백교’라고 주장함으로써 대종교와 거리를 두었다. 1975년 10월 8일 안호상 · 문정창 ·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고 1976년부터 국사찾기협의회의 기관지 『자유』에 여러 글을 실었다. 『자유』 1976년 8월호와 9월호에서는 「이병도 사관을 총비판한다」라는 글을 통해 이병도를 식민사학계의 대표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0월 22일 조선일보사 주필 선우휘(鮮于煇)와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국사를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역사관이 신채호 및 정인보와 유사하고, 세계주의는 허울 좋은 이기주의이며 홍익사상이 곧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1911년 계연수가 『 환단고기』를 편찬하면서 1980년 세상에 공개하라고 유언하였다고 스스로 주장하면서 1979년 해당 책을 영인하였다. 『환단고기』에 관해서는 계연수의 활동과 사상 등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에서는 위서(僞書)로 간주하고 있다.
1986년 4월 18일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30년대 조선유교회의 삭주 지역 전교사로 활동하면서 유교의 확대와 공자 대동주의의 철저화에 전념하여 1934년 삭주향교 명륜당에서 열린 제1회 대성절 기념축일 때 '공부자(孔夫子)의 철환천하의 재인식과 그 5교의 신통일 원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35년 8월 27일 조선유교회 삭주전교실에서 열린 제2회 대성절 기념식에서는 '공자를 신앙할 이유'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71년 『환단휘기』, 1973년 『광개토성릉비문역주(廣開土聖陵碑文譯註』 및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同源論)』을 펴내고, 1976년 『커발한문화사상사』(I · II)를 발간하였다. 1983년 『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를 간행하였고, 1986년 그동안 정리된 『대배달민족사』 5권을 간행하였다.